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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노엘과 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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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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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 가장자리 톡]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시장 골목길에 커피집이 있다. 서른세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사장이다. 몸은 홀쭉하고 머리는 장발인데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다. 갸름하고 창백한 얼굴에는 설핏 드러났다 사라지는 직업적인 스트레스의 흔적이 묻어있다.
 
여름 내내 창가 쪽 2인용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더위를 식혔다. 책을 보다가 창 너머 전깃줄 사이로 둥둥 떠 있는 구름도 보았다. 손님이 뜸하면 젊은 사장과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해졌다. 그는 얼마 전 문을 연 칼국수 집 젊은 여자 주인의 이야기까지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이 자리에 커피집을 차린 사연을 들려준다.
 
"먹고 살아야 했거든요. 결혼도 했는데. (잠시 말이 없다) 두려웠어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잖아요! 시장 골목에 폐업한 이용소가 있더라고요. 남자 머리털 깎아주는 이발소 있잖아요? 이 자리에서 삼십 년 넘도록 이발을 했는데, 아픈 바람에 문을 닫았더라고요. 어디가 아픈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는 이발사의 인생에 마음이 끌려 커피와는 상관도 없는 빨갛고 파란 나선무늬가 인상적인 바버폴(Barber Pole)을 폐기하지 못했다. 늙고 병든 이발사의 공간을 젊은 바리스타의 커피 공간으로 만드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그게 좀 엉뚱해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커피 이용소'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그해 겨울에 아내를 위해 강아지를 데려왔어요.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아내가 강아지를 보자마자 '노엘아!' 하고 부르는 거예요. 노엘이 크리스마를 뜻하잖아요. 그렇게 한 식구가 됐어요. 행복했어요.
그런데 새옹지마라고 하잖아요. 진짜 새옹지마였어요. 노엘이 아프기 시작하더라고요. 동물병원 수의사는 희귀질환이라고 했어요. 유명하다는 동물병원은 다 찾아다녔어요. 서울까지요. 엠알아이 찍는데 수백만 원이 들었어요. 우리 형편에 가당찮은 금액인데…… 어쩌겠어요. 한 식군데…… 새마을 금고에서 빚을 냈어요. 불행한 날들이었어요."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문이 열리더니 골목 맞은편에서 라면집을 하는 총각이 들어온다. 그가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받아든 총각이 돌아가자 이내 말을 잇는다.
 
"아내는 아픈 노엘을 돌보는 일만 했어요. 그렇게 오 년이나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 그랬어요. 제가 봤잖아요. 사람이나 개나 다를 게 없어요. 오 년째 되던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노엘이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입술을 꾹 다문다) 별이 됐어요."
 
그는 그때부터 아내에게 우울의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눈치챘다. 상황이 점점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며 고개를 흔든다. 정신과에 가보자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내가 조금 더 마음을 열 때까지의 배려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며 기다리고 참았다.
 
"아까 새옹지마 얘기했잖아요? 새옹지마가 맞아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거든요. 아내와 저는 결혼 할 때부터 그걸 생각하지 않았어요. 개와 고양이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내가 그걸 한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내가 임신한 거라고요! 노엘이 떠난 지 딱 두 달 만에요. 우린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거든요."
 
손님이 들어온다. 통통하고 키가 작은 여자가 강아지를 안고 있다. 함께 온 아이는 딸이다. 그가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간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동하는 소리가 쉬이익- 울린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숨을 고르더니 끝내지 못한 사연을 이어간다.
 
"아내가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하엘'이라는 이름을 주자고 하더라고요. 하엘이 뭔지 아세요? 하늘에 계신 존귀한 그분의 호칭에서 나온 거래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하엘이 뱃속에서 점점 자라면서 아내의 우울증이 잦아들더라고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커피 이용소 벽에 걸어 놓은 바버폴이 겹쳐진다. 고단한 삶처럼 돌아가는 빨갛고 파란 나선무늬에서 막막한 삼십 대의 심연이 보일 듯 말 듯 그를 에워싸고 있는데도 그의 이야기는 밝고 아름답다. 미지의 날들이지만 사랑스럽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커피 팔아서 살만하냐는 물음에 아직은 먹고 살만하다고 한다. 아직 하엘이 어리니까…… 아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는 기죽지 않는다. 손님들에게 커피를 내려주는 일과 아침 일찍 스콘을 굽는 일이 행복하다고 했다. 하엘이 벌써 다섯 살이라고 자랑한다.
 
다시 문이 열린다. 손님이 아니라 그의 아내다. 검은색 원피스에 오렌지 빛깔의 에코백을 매고 있다. 서른 살의 당당함과 기운이 흐른다. 고달픔을 딛고 내일을 바라보는 표정이다. 일전에 인사를 나눈 터라 반가워한다. 손을 잡고 뒤따라 들어오는 아이가 하엘이다.
 
"다섯 살 하엘! 안녕!"
 
하엘이 머리를 돌린다. 엄마가 "인사해야지!"하고 달랜다. 하엘은 오히려 머리를 흔들며 엄마 치마 속으로 숨는다. 창 너머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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