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의과대학 증원 정책에 반발해 병원을 떠났던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에 복귀한 1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 의료진들이 이동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의정 갈등이 일부 봉합되면서 전공의들이 병원으로 복귀했지만 지방의 의료 현장은 절반의 정상화에도 못미치고 있다.
인력 공백을 해소하지 못한 상급종합병원들은 혹시나 의료진이 떠날까 우려하고 있고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질 지방 의료원들은 의사가 없어 진료 과목을 폐쇄하는 최악의 위기에 처했다.
비수도권 격차 '심각' 이마저도 "이탈 막아라"
지난해 2월 의과대학 증원 정책에 반발해 병원을 떠났던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에 복귀한 1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 의료진들이 이동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8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5년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 결과 선발된 인턴과 레지던트는 총 7984명으로 집계됐다. 지역별 선발 인원 비율은 수도권 수련병원이 63%, 비수도권 수련병원은 절반 수준인 53.5%에 머물렀다.
비수도권 지역 중에서도 열악한 의료 환경에 꼽히는 강원지역의 경우 평균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림대춘천성심병원은 지난 1일부로 17명의 전공의가 선발돼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이 병원 전공의 정원은 56명으로 기존에 근무하던 전공의 28명 포함할 경우 겨우 절반을 기록했다. 이들을 제외할 경우 선발 인원은 정원 대비 단 30%에 그친다.
도내 유일한 국립대병원인 강원대병원의 경우 모집 정원(116명)의 50% 가량이 선발됐다.
강원대병원은 의료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박홍주 진료부원장(비뇨의학과 교수)이 내부 태스크포스(TF) 팀을 꾸린 상태다. 전공의들의 수도권 집중 현상이 일어나면서 의료진들의 이탈을 막겠다는 취지다.
병원 관계자는 "전공의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내부적으로 여러 방안들을 강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강릉아산병원의 경우 이번 선발 모집에서 16명의 기존 근무인원에 15명이 새롭게 들어오면서 정원(43명) 대비 72%라는 높은 선발 비율을 기록했다.
김성근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지역에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전공의들이 많아서 비수도권 선발 비율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며 "흔히 말하는 필수의료, 핵심의료 과목들도 복귀율이 훨씬 낮은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교수들의 퇴직, 진료지원(PA) 간호사 투입 등으로 수련병원들의 교육 환경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며 "정부는 현장에서 이어지고 있는 혼란을 빨리 정리해야 하고, 전공의 수련 관련 예산과 관심도 더 많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방의료원 '사직 러시' 33번 채용공고 냈지만 지원 '0'
서울의 한 의과대학 모습. 류영주 기자강원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지방의료원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의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강원도내 대표 '의료 낙후 지역'이자 영월과 평창, 정선 등 강원 남부권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영월의료원은 지난해 5명의 의사들이 퇴사한 데 이어 올해에만 의사 5명, 공중보건의(공보의) 3명이 병원을 떠났다.
정신건강의학과의 경우 지난해 11월 전문의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둔 지 1년 10개월째 공석이다. 무려 33차례 채용 공고를 냈지만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근무시간을 협의하고 주 2회 근무 조건까지 내걸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활의학과의 경우 올해 4월 공보의 복무기간 만료로 진료과목 운영을 전면 중단했다. 영월의료원 관계자는 "지역 특성상 의사 공고를 내면 지원조차 없다"며 "인력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호소했다.
삼척의료원의 경우 소아청소년과 의사 A씨가 지난 2월 병원에 들아온 지 4개월 만에 병원을 떠나는 등 6명이 병원을 그만뒀다. 강릉의료원과 원주의료원도 올해 각각 5명의 의사가 사직했다.
한 의료원 관계자는 "지방의료원은 정원의 개념이 없이 현재 근무 인원을 정원으로 봐야할 만큼 의사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지방의 열악한 처우와 불편한 정주여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수도권을 선호할 수 밖에 없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지역필수의사제 도입' 의료 격차 마중물 될까
류영주 기자열악한 지방 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 중인 '지역필수의사제' 시범 사업지역으로 강원도가 선정되면서 사업 추진이 속도를 내고 있다.
지역의사제는 지방에서 장기 근무할 지역 필수의사에게 지역근무수당과 정주 여건을 지원해 지역 간 의료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목표로 추진, 지난 7월부터 강원도와 전남, 경남, 제주 등 4곳에서 시범 운영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내·외·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및 응급의학·심혈관·흉부외과 등 주요 8개 필수 진료 과목의 5년차 이내 전문의 가운데 지역에서 5년간 장기 근무하기로 계약을 맺는 내용이다.
강원도의 경우 강원대병원과 한림대 춘천성심병원, 원주 세브란스기독병원, 강릉아산병원 등 4곳이 참여했다. 참여 의료기관 소재 지자체인 춘천·원주·강릉에서는 지역 정착 수당으로 월 100~200만원 상당의 지역상품권을 지급할 계획이다.
강원도의사회 등에 따르면 현재 전체 모집 인원 96명 중 강원도는 15명의 전문의가 지원했다. 수도권과 인접한 춘천과 원주의 경우 지원률이 높았던 반면 강릉아산병원은 지원자가 전무한 상태다. 산부인과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영미 도 복지보건국장은 "필수 진료과 의사 확보를 위해 의료기관 및 지역 의사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인재를 유치할 계획"이라며 "지역 필수의사 확보와 유지를 통해 도내 의료 격차를 해소하고, 중증·응급 환자의 유출을 줄여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의료계 "사회적 합의 필요, 사법리스크부터 해결해야"
김택우 대한의사협회장. 연합뉴스의료계는 지역의사제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정부와 의료계간 사회적 합의를 통한 투명성 있는 정책 추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근본적인 대책으로 의료인들에 대한 '사법리스크' 해소가 급선무라는 입장이다.
신기택 대한의사협회 기획이사(강원도의사회 부회장)는 "지역 의료 격차 해소와 의료 인력 문제의 심각성은 공감한다"면서도 "지역의사제에 대한 (정부의) 명확한 설계가 없고 사회적 합의도 없는 상태에서 추진한 정치적 사안"이라고 비판했다.
권태형 원주의료원장은 "의사 인력 충원은 항상 어렵고 지금 같은 시기 채용이 더 경색된 상황"이라며 "지역의사제가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제도이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다 죽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15년 뒤의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했다.
의료인들에 대한 '사법리스크' 해소가 필수 의료와 지방 근무 기피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진료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의료 사고나 과실 책임을 의사 개인에게 전가하는 구조가 해소되지 않는 한 아무리 정부가 지역의사제를 활성화시키려 해도 지방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정렬 강원도의사회장은 "의사는 자신의 환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람으로 느끼고 그 보람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며 "그런데 사고가 나면 구속이 되고, 수억 원을 물어내야 하니 '안하고 말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들이 제일 걱정되고 불안하고 두려운 건 사법리스크인데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 않는다면 '언 발에 오줌 누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