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CBS가 단독 입수한 춘천고 '상록회' 연구 자료. 1994년 일본 효고교육대학대학원 학교교육연구과 교과·영역교육전공 사회계 과정에 재학 중이던 이누마 히로카즈(飯沼博一) 씨가 저술한 <春川常緑会事件硏究(춘천 상록회 사건 연구) - 상록회 신문 기록을 통해서> 논문이다. 진유정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학생 항일운동 '춘천 상록회'를 아시나요? ②'광주 1929, 춘천 1938' 학생운동 '민족차별 저항' ③학생항일운동 '구호 넘어 독서회와 계몽'으로 ④"상록회 정신, 부조리와 싸운 젊은 용기" ⑤광복 80년, 다시 돌아온 상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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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와 일본 연구자가 되살린 춘천 학생운동의 진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학생 민족 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같은 시기 강원도 춘천에서 10대 고등학생들이 일제에 맞서 싸웠던 '춘천 상록회 사건'의 존재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1937년 춘천 상록회가 결성된 해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을 확대하며 중일전쟁을 시작한 해(1937년 7월)와 같다. 만주사변(1931년) 이후 조선의 학생운동은 급격히 감소했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극에 달해 어떤 저항 활동도 극히 제한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 속에서도 춘천 상록회는 끝까지 민족의식을 지키며 항일 운동의 불씨를 이어간 마지막 학생운동이었다.
강원CBS는 1994년 일본 효고교육대학대학원 학교교육연구과 교과·영역교육전공 사회계 과정에 재학 중이던 이누마 히로카즈(飯沼博一) 씨가 저술한 <春川常緑会事件硏究(춘천 상록회 사건 연구) - 상록회 신문 기록을 통해서> 논문을 국내 언론 가운데 최초로 입수, 이를 바탕으로 춘천 상록회 사건을 재조명하는 취재에 착수했다.
이 논문은 당시 항일 청년 학생들의 활동상을 일본 연구자로서 처음 조명한 작업이었다. 이누마 씨는 상록회 사건과 관련된 과거 신문 기록을 발굴해 상록회의 실체와 역사적 의미를 재구성했다. 연구자는 일본인이었지만 이 논문을 통해 일제 강점기 춘천 지역 학생들의 민족 저항 기록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누마 씨가 '춘천 상록회 사건'의 신문 기록을 알게 된 배경에는 재일동포 한석희(韓晳曦) 씨의 조력이 있었다. 제주 출신 한석희 씨는 6세 때 일본으로 넘어가 대학을 마친 뒤 고베시 에마구에서 청구문고(靑丘文庫)를 운영하며 한국 관련 사료를 수집·보존해 온 인물이다. 청구문고에는 서울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이 발굴한 상록회사건 관련 신문 기록의 복사본이 소장돼 있다.
이누마 씨는 이를 통해 논문의 첫 단추를 꿸 수 있었다. 당시 청구문고 외에도 또 다른 복사본이 일본 국제기독교대학(ICU)에도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제기독교대학에서는 이 자료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서울의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 역시 당시에는 자료 연구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본인 연구자인 이누마 히로카즈 씨가 '춘천 상록회 사건'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석희 씨라는 재일동포의 헌신과 한국 교회사 연구자들의 발굴 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타국인이 쓴 논문일지라도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숨은 역사가 다시 조명될 수 있도록 만든 단초였다.
10대 항일 비밀결사 '상록회' 출범
강원CBS 취재를 통해 확인된 춘천고 상록회 활동으로 검거돼 재판을 받은 남궁태(왼쪽), 이찬우(오른쪽 위) 문세현 수형기록 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이 논문에 따르면 춘천 상록회는 춘천중·춘천고의 전신인 춘천고등보통학교(이하 춘천고보)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단체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가 한층 더 강화되던 시기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병참기지화 정책의 중심으로 편입됐고 학생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에 대한 사상 통제와 동화 정책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민족교육은 철저히 억압됐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크게 제한됐다.
1937년 3월 14일 춘천고보 5학년 남궁태·이찬우·문세현·용환각·백흥기·조규석 등 6명은 상록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이들은 야학운동, 여성계몽운동 등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경찰은 오정리 경로회, 모곡소년단, 부인회 등 학생들의 일상적 모임조차 국가전복 음모로 몰아부쳤고 남궁태 등 11명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결사체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상록회의 모든 활동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간주됐으며 이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른 학생들 중 일부는 결국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천황제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일본의 법률이다. 겉으로는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단속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 운동, 자치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까지 폭넓게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됐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조선 내 모든 자발적 움직임은 치안유지법의 감시망에 포섭됐다. 학생 독서회, 농민조합, 부인회 활동은 모두 치안질서 교란 행위로 규정됐다. 특히 10대 학생들의 주도적 움직임은 더욱 강력한 단속 대상이 됐다.
상록회사건 의견서 기록 제11호 검증조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논문을 통해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상록회사건 의견서 기록 제11호 검증조서'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춘천공립중학교(현 춘천고) 학생들의 독서 모임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수사받은 사실이 여러건 기록돼 있다.
위 지도(사진)는 1937년 강원도 춘천에서 발생한 항일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과 관련해 일본 경찰이 제작한 것으로 <이찬우 외 치안유지법 위반 범죄 장소 위치도>이다.
지도 중앙에는 춘천 시내와 그 주변 산지 지형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으며, 주요 산·도로·하천 등이 표시돼 있다. 상록회 사건과 관련된 회합 장소는 숫자 ①~⑥ 등이 표시되어 있다.
① 전평리 하천변 집회 장소, ② 화원정 2정목(현 춘천 낙원동) 공원 집회 장소, ③ 봉의산 정상 집회 장소, ④ 여학교(춘천고등여학교) 인근 집회 장소다. 이 지도는 1937년 춘천 지역에서 발생한 상록회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이 사건 관련자의 활동 동선, 회합 장소 등을 시각적으로 정리한 문건이다. 각 지점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어 사건 당시 경찰의 체포 작전 및 감시 체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시행된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단순한 저항 탄압을 넘어 조선인의 사상, 언어, 행동 전반을 통제하는 총체적 지배 기제였다. 자유를 억압하고 미래 세대를 위축시키며 사상적 빈곤을 강요했다.
장용경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문학박사)은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당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소규모 비밀 결사 형태로 민족 운동을 하는 것이 전형적인 방식이었는데, 상록회가 바로 그런 10명 내외의 비밀 단체였다"며 "치안유지법은 조선 사회를 마비시키려는 제도적 폭력이었다. 상록회 같은 학생 조직은 이러한 억압에 맞선 상징이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