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TV토론회에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며 "여성 혐오에 해당하느냐"고 질문한 장면이 그대로 생중계됐다. 이 발언은 단순한 논란을 넘어, 여성이 여전히 정치에서 '부차적 존재'로 여겨지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12.3 내란사태에 분노한 2030 여성들이 주축이 돼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광장'이 열어낸 21대 대선. 하지만 '여성 공약'을 정치적 리스크로 취급하는 분위기 속, 성평등 의제는 여전히 후순위라는 지적이 잇따른다.
정부 女고위직 10%대…'여성대표성 확대'는 모든 후보가 부실
여성단체가 꼽은 최우선 핵심 과제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여성 대표성 확대'다. 내각 구성, 공공기관 임원 임용, 정당 공천시 특정 성별 60% 초과 금지 등 성별 균형이 주요 요구사항이다.
세계경제포럼(WEF) '2024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정치 권한 분야 146개국 중 72위,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03위다. 22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 비율은 20.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다. 2023년 기준 여성 장관 비율은 15.7%(3명), 차관은 13.8%(4명)에 그쳤다. 중앙부처 여성 고위공무원 비율은 11.7%로 10%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 등 주요 대선 후보 모두 구체적 제도 개혁 공약을 내놓지 않았다.
이재명 후보는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8일에는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이 계속되고 있어 여가부의 역할을 폐지할 상황은 아니다"라며 "내각 구성 시 성별과 연령별 균형을 고려하겠다"고 성평등 거버넌스 체계 강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각을 비롯한 정부와 산하기관 내 여성 대표성 확대를 위한 수치 제시는 빠졌다. 이재명 후보는 20대 대선에서 내세웠던 '소수 성 30% 이상' 목표를 이번엔 제시하지 않았다.
김문수 후보는 여가부 존폐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인구·돌봄·가족·청년·고령 등 인구 관련 정책을 총괄 조정할 '인구청년가족부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이준석 후보는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대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놨던 '여가부 폐지'를 재차 내세웠다.
연합뉴스여성현실연구소 권김현영 소장은 "'여성가족부 폐지' 그 일곱 글자를 시작으로 모든 게 퇴보했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지난 대선에서 윤 전 대통령이 이른바 '젠더 갈라치기'로 특정 연령, 특정 세대로부터 몰표를 받아 당선에 성공한 탓에, 이후 정치권에서도 이 같은 프레임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윤 전 대통령이 젠더 갈등을 정치 기본값으로 만든 결과, 여성 공약은 표를 잃을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며 "여가부 폐지 공약을 내놓아 윤 전 대통령과 다름없음을 자인한 이준석 후보는 물론, 민주당조차도 이 구조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터에서의 성차별'…임금 격차 해소 시도는 이재명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2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신종합운동장역 앞 유세장에서 기표 기호가 그려진 야구공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일터에서의 성차별, 특히 임금 격차는 여성 유권자들이 체감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 불평등이다. WEF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2022년 기준 31.2%로, OECD 평균(11.4%)의 세 배 수준이다. 남녀 임금 격차가 30% 이상인 국가는 OECD 중 한국뿐이다.
이재명 후보는 '고용평등 임금공시제'를 도입해 임금격차를 공개하고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또 여성벤처기업 투자 활성화, 경력보유 여성 채용 기업 세제 혜택 등 정책금융 지원도 약속했다. 이외에 여성 과학기술인 경력 지원, 공공기관 성평등을 위한 성별 평등 지표 반영 등 조직문화 개선책도 제시했다.
김문수 후보는 △현행 공무원 규정인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를 공공기관에 확대 적용 △'WOW 프로젝트'(경력단절 여성 복귀) △'부분근로자 대표제' 도입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임금격차 등 구조적 성차별 해소보다는 실무 개선 수준에 머문다는 지적이다.
이준석 후보는 관련 공약을 내놓지 않았다.
여성안전 공약에는 공감대…스토킹·딥페이크 등에 방점
여성 안전에 대해서는 세 후보 모두 공감대를 형성하며 여러 공약을 내놓았다.
이재명 후보는 교제폭력 국가 공식 통계 작성, 접근금지명령제도 강화, 스토킹·가스라이팅 대응체계 마련 등을 공약했다. 특히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는 디지털성범죄지원센터 인력 확충 및 전문성 제고, 딥페이크 탐지기술 개발 지원 등 구체적인 정책이 다수 포함됐다.
김문수 후보는 교제폭력·스토킹 대응 법체계 보완, 여성안심주택 인증제 도입 등을 내세웠다. 또 디지털 성범죄 대응을 위한 딥페이크 피해자 보호체계 정비 등도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준석 후보는 범죄피해자 지원관 제도를 제안했다. 다만 디지털 성범죄 대응 공약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여성 군복무 참여 공약도…金 '군가산점제'는 시대 역행 우려
연합뉴스
여성 대상 국방 관련 공약으로는 김문수 후보와 이준석 후보가 '여성희망복무제'에 한 목소리를 냈다. 한국보다 성평등에 있어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북유럽 국가들과 이스라엘에서는 여성 징병제를 기반으로 여군 비율이 우리의 11%을 크게 상회하는 약 30% 수준에 이른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문제는 김문수 후보가 여성의 군 복무 참여 기회를 넓히는 이 제도를 제시하면서 '군가산점제'의 부활도 함께 추진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군가산점제는 1999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린 사안으로, 성평등 원칙에 역행하는 퇴행적 공약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군가산점제 부활은 구체적 내용 없이 슬로건처럼 던져 남성 표심을 얻어보겠다는 '갈라치기' 전략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여가부 폐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공약이라는 지적이다.
"여성정책 컨트롤타워 필요…맹목적 일반화 경계해야"
여성계는 이 같은 각 후보들의 공약 제시 외에도, 성평등 관련 정책이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각 부처의 여성정책을 통괄할 컨트롤타워를 세우거나, 각 부처 내에 이를 관리할 '워치독'(Watch Dog) 기능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신경아 교수는 "성평등 정책은 여가부 확대 개편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등 모든 부처가 성평등 관점을 갖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성주류화' 추진 기구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란 모든 정책 과정에서 성별 관점을 통합해 성평등을 실질적으로 실현하려는 전략이다. 여성계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구로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하거나, 여가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미 발생하고 있는 각종 범죄나 성차별 현상에 대해 언급할 때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언급을 뺀 채 일반적인 상황으로 간주해 대응하겠다는 의식구조에 대한 지적도 제기됐다.
한 여성정책 국책기관 관계자는 "여성정책이 성별을 지운 일반 복지정책이나 범죄 피해자 보호 지원책으로 통합되는 방식이 아니라, 성차별의 구조적 원인을 명확히 진단해 설계돼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