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황진환 기자
12·3 내란 사태의 후폭풍으로 대한민국 경제가 역사상 손에 꼽힐 위기로 들어서고 있다. 경제 정책의 수장들이 내년 성장률을 1%대에 그칠 것이라고 관측한 가운데,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추가 경정 예산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3일, 내란 사태 이후 처음으로 기자간담회를 열어 내년 경제성장률에 대해 "잠재성장률보다 소폭 밑돌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날 최 부총리가 정확한 수치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통상 한국의 잠재성장률 수준을 2% 내외로 보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2025년 경제성장률이 1% 후반대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한국은행도 내년 성장률을 1.9%로 예상했던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8일 "국회를 통과한 예산안이 긴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며 이보다 더 낮은 수준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기획재정부 제공
통상 경제성장률로 부르는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2% 밑으로 떨어진 일은 한국은행이 관련 집계를 시작한 1954년 이후 단 6차례 뿐이었다.
20세기 중에는 한국전쟁의 여파 속에 미국의 무상원조가 감축됐던 1956년(0.7%)과 제2차 석유 파동 중에 내란을 일으켜 신군부가 집권했던 1980년(-1.5%),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8년(-4.9%)이 있다.
21세기 들어서는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맞았던 2009년(0.8%),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2020년(-0.7%), 코로나19 이후 전세계적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던 2023년(1.4%)에 성장률이 2% 미만을 기록했다.
심지어 2022년에는 코로나19 사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2.7% 성장률을 기록했고, 올해도 2% 초반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위처럼 일시적으로 성장률이 급추락한 일은 있어도, 4년 연속 1~2%대의 극도로 낮은 성장률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은 전례가 없을 일이다.
한국은행 제공
이에 대해 이창용 총재는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투입을 강조했다. 특히 "추가경정예산안이나 중요 경제 법안이 여야 합의로 빨리 통과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야당의 추경 편성 요구에 힘을 실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역시 최 부총리의 기자간담회가 열린 날 "경기를 살리고 민생을 회복하려면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 역할, 추경이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며 추경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반면 최 부총리는 다소 뜨듯미지근한 반응이다. 최 부총리는 "당장 1월 1일부터 예산이 집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조기 추경'에 선을 그었다.
추경 필요성에 대해 정부와 한은이 서로 다른 신호를 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1년 전체로 봤을 때는 추경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 한은 총재의 의견"이라며 "어떠한 시기에 어떻게 (추경)하는 것이 필요한지, 그 내용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얘기는 또 다른 말씀"이라고 말했다.
즉 내년에 추경 예산이 마련될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추경을 편성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용민(왼쪽부터) 원내정책수석부대표와 박찬대 원내대표, 박성준 원내수석부대표가 12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안과 앞에서 '국무총리 한덕수 탄핵소추안'을 제출 보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윤창원 기자
대신 최 부총리는 크게 2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우선 현재 국회에서 통과된 예산안을 상반기 조기집행해 정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여야정 협의체로 경제 관련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키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본인이 예측한 '역대급 위기'에 걸맞은 해법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선 여야정 협의체 역시 탄핵 정국으로 여야 대립이 첨예한 가운데, 민주당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 여당이 협의체를 '회피 수단'으로 악용한다면서 '권한대행 탄핵'까지 제기하는 마당에 단기간에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높지 않다.
또 그동안 정부는 정권에 관계없이 예산안·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할 때마다 '경기 회복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면서 '상반기 중 예산 조기집행'을 단골 메뉴로 들고 나오곤 했다. 당장 올해도 상반기에만 정부 예산의 75%를 배정했고, 실제로 1분기 만에 32.3%를 집행해 '4월 총선 사전 선거운동 아니냐'는 비판까지 받았다.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우석진 교수는 "예산의 조기 집행은 상반기에 충분히 재정을 풀어서 결국 한 해 동안 전체 예산을 남김없이 활용한다는 의미일 뿐, 단순히 일찍 집행하는 것만으로 경기에 절대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며 "올해만 해도 예산을 조기집행하면서 1/4분기 성장률은 1.3%를 기록했지만, 2분기 0.2% 감소 후 3분기 0.1% 성장에 그쳤지만, (이미 예산을 많이 사용해서) 이러한 하반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아주대학교 국제학부 김용기 교수는 "올 초의 경우에도 오히려 전년동기대비 0.6% 예산 집행이 줄어든 바 있다"며 "예산의 조기집행도 여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또 "윤석열 정부의 재정정책은 정부가 해야 할 경기 대응을 해야 함에도 이념적이고 공상적인 '건전재정', 즉 사실상 정부 재정의 역할을 방기하는 소리만 높였다"며 "추경의 필요성은 (윤석열 정부 임기 내내) 언제나 있다"고 주장했다.
최 부총리 스스로도 "전망치 숫자보다 그것이 주는 의미, 불확실성이 더 크다"며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려를 풀어줄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마당에, 과거 대책을 반복하는 해법만으로 시장에 팽배한 불안을 풀어주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왼쪽)와 국민의힘 권성동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12월 18일 국회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마치고 자리에 앉고 있다. 권 권한대행은 민주당이 탄핵소추를 남발했다며 이를 풀어줄 것을 당부했고, 이 대표는 민생을 안정시키자며 추가경정예산안을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윤창원 기자
이에 대해 전문가들도 내란-탄핵 정국이라는 긴박한 정황을 고려하면 비록 예산 편성 직후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연초 추경 편성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김정식 명예교수는 "어차피 예비비 등을 합의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경기 부양 목적을 떠나서도 연초 추경은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내수 진작을 위해 재정 지출을 얼마나 늘리냐를 두고 여야가 협력할 일만 남았을 뿐, 국내외 경제 상황이나 성장률 전망을 볼 때 경기 부양 추경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석진 교수도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본예산을 아직 시행도 안했으니 추경을 편성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은 예산 증액 심사를 진행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을 일으켜 제대로 증액하지 못한 상황"이라며 "1월에 추경안을 편성해도 국회를 통과하면 빨라도 3, 4월에야 시행될 것"이라며 '속도전'을 주문했다.
대신 "어차피 현재 정치 상황에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수밖에 없을 텐데, 그렇다면 새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에 맞춰 대규모 추경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예산안에서 감액됐던 4조 1천억 원 규모 내외 수준에서 민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소규모 추경을 빠르게 합의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애초 정부가 내놓았던 예산안 자체가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다 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조기 집행' 여부는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정세은 교수는 "예산안 자체에 현 상황에서 국가가 역할을 해줄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본예산을 조기 집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예를 들어 자영업자의 경우 현재는 금리를 지원하는 정도일 뿐인데, 연말연초 특수가 실종된 상황에서 매출 자체를 끌어올리도록 지역화폐 등 소비를 유도할 수 있는 추경을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전성인 교수는 "최 부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상당수가 비상계엄 사태 당시의 피의자도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경제성장률을 높이겠다고 대규모 경기 부양에 나서는 것은 권한 밖의 일이나 다름없다"며 "추경 여부는 최상목 경제팀이 개입하고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또 야당에 대해서도 "예산안이 통과되자마자 대규모 추경을 서두르는 것은 '섣부른 대통령 놀이'가 될 수도 있으니 야당도 일정 부분 자제해야 한다"며 "어차피 내년 경제 정책은 새로운 정부가 내놓을 것이고, 당장 정부와 정치권은 내년 1분기까지 자영업자 등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위기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