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완순 할머니가 4·3 당시 밭에 끌려갔을 때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고상현 기자"'계엄'이란 단어 듣고 밤에 한숨도 못 잤수다(잤습니다)." 제주시 북촌리에 사는 고완순(85) 할머니는 4일 CBS노컷뉴스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전날 밤 갑작스레 이뤄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70여 년 전 4·3 당시 9살 소녀였던 고 할머니는 군경이 북촌리 주민 300여 명을 총살한 사건에서 살아남은 희생자다. 이 사건은 현기영 소설가가 쓴 '순이삼촌'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부는 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을 진행했으며 해안마을 주민도 학살했다.
그런 탓에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고 할머니에게 간신히 아물었던 생채기에 다시 피가 스미게 했다. 자신의 동생과 친구, 이웃을 학살했던 명분이 계엄령 선포였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역시 계엄령 선포 이유로 '종북세력 척결'을 들며 해묵은 이념 논리를 꺼냈다.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역. 고상현 기자
고 할머니는 "우리 죽일 때도 계엄령을 선포하고 죽였다. 몽둥이로 패서 죽이고 대창으로 난도질해서 죽였다. 종북세력이 뭐냐. 자기 권력 지키려고 내세운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3 때는 제주도에만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어제(3일)는 전 국민을 이념 대립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지금은 해제됐지만, 걱정돼서 계속 뉴스만 본다"고 했다.
4·3 당시 부모를 모두 잃고 한평생 학살 고아로 살아온 오순명(81) 할아버지 역시 "70여 년 전 4·3 때나 지금이나 이념 대립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며 가슴을 쳤다.
"지금 계엄령 내릴 상황이 아닌데 탄핵이니 특검이니 얘기가 나오니 충동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게 아닐까 싶다. 이랬을 때 국민의 삶과 두려움은 생각도 안 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날 도내 30여 개 노동‧시민사회‧정당단체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임기환 민노총 제주본부장은 "포고령을 보고 4·3 시기 수많은 도민을 학살한 불법 계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비상계엄은 반헌법적이며 반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인 폭거"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