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여야 합의로 통과되고도 4년 동안 표류하던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가 결국 폐기 수순에 들어섰다.
여야와 정부가 함께 추진했던 정책이 여론에 밀려 사장되면서 정책 신뢰도 훼손을 피할 수 없게 됐고, 정작 '빅딜' 대상이었던 거래세율 인하는 예정대로 강행된다. 가뜩이나 부족한 정부 재정에 세수까지 말라붙을 위기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는 금투세 폐지에 동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금투세는 주식·채권·펀드·파생상품 등 금융투자로 5천만 원(주식) 이상의 양도 소득을 올린 투자자가 내는 세금이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에 따라 수익을 거둔 경우에만 과세해 공평성·소득불평등 개선하겠다며 추진됐다.
애초 2020년 12월 관련 법이 통과됐지만 개인투자자들의 반발 등을 감안해 시행이 2년 유예됐다. 또 정작 2년 뒤인 2022년에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추가로 2년 유예돼 총 4년간 시행이 차일피일 미뤄져 내년에야 시행될 예정이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10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금투세를 아예 폐지하겠다며 법 개정을 추진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달 "금투세 폐지를 통해 시장 불안 요인을 제거하고, 우리 자본시장을 발전시키는 데 여야가 함께 힘을 모아주기를 기대한다"며 야당을 압박해왔다.
이 대표의 이번 결정에 여당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섰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늦었지만 금투세 완전 폐지에 동참하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고, 같은 당 추경호 원내대표도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화답했다.
애초 민주당은 예정대로 금투세를 시행하려던 입장이었지만, 총선 이후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수차례 입장을 번복한 끝에 결국 이를 용인했다. 이 대표는 금투세 시행을 폐지하기로 결심한 근거로 "지금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어렵고, 1500만 주식 투자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금투세는 민주당 집권 시기 정부의 엄호를 받으며 여야의 합의 아래, 국회를 무사 통과했던 제도다. 이를 명확한 명분도 없이 일부 개인투자자들의 반발에 밀려 두 차례나 유예하고도 끝내 폐기까지 하면, 앞으로 정부·국회가 내놓을 다른 금융 법·제도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배재대학교 경영학과 김현동 교수는 "금투세 법에 일부 보완할 부분은 있지만, 폐지할 정도의 흠결은 아니라고 본다"며 "단순히 금투세 만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상품 조세체계의 비정합성·비체계성이나 조세 중립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면적인 개편을 통해 자본시장을 선진화하려던 것인데 이것이 막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정책의 신뢰도 측면에서 보면, 세법도 다른 법과 마찬가지로 법적 안정성, 예측 가능성이 매우 중요한데도 음모론, 여론에 밀려 시행을 예고했던 법 개정 사항을 아예 없던 것으로 했다"며 "앞으로도 이처럼 조세 저항이 일 때마다 정치인들이 눈치만 본다면 대규모 세제 개편은 다시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0월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날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는 금투세 폐지에 동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가뜩이나 부족한 세수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미 정부는 최근 세수 예측에 실패하면서 2년에 걸쳐 총 86조 원의 세수 결손 사태를 빚었는데, 금투세가 폐기되면 국세 수입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금투세가 예정대로 내년에 시행될 경우 향후 3년 동안 연 평균 약 1조 3천억 원의 세수가 늘어날 것으로 봤는데, 이 세수가 고스란히 사라지게 됐다.
특히 현 정부의 감세 기조에 맞서 확장 재정을 강조하던 민주당이 정책의 방향 자체를 잃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예정처에 따르면 금투세 적용 대상 예상 규모는 2022년 기준으로 계산할 때 15만 명으로, 금투세는 전체 주식투자자 1440여만 명 중 상위 1% 수준이 내는 '부자 세금'인데 이를 폐지한 것이다.
참여연대·민주노총·민변은 공동성명에서 "민주당의 갈팡질팡 행보는 결국 부자감세 동조로 귀결되고 말았다"며 "자산 세제는 무력화하면서 13조 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민생회복지원금과 같은 '이재명표 예산'을 어떻게 실현시키겠다는 것인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증권거래세율 인하 조치다. 시장의 충격을 덜겠다며 정부는 금투세 시행을 전제로 거래세율을 올해까지 유가증권은 0.03%, 코스닥은 0.18%까지 낮춘 데 이어 내년에는 각각 0%, 0.15%로 더 낮출 계획이다.(참고기사 : [단독]금투세 미뤄지는 동안…증권사 거래세 2500억원 혜택)
거래세율은 정부 시행령으로 정하기 때문에 금투세 논의와 별개로 정부가 결정한다. 하지만 정부는 금투세 폐지 여부와 관계없이 거래세율을 계획대로 낮추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9월 "시장상황을 봤을 때 거래세는 스케줄대로 인하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정세은 교수는 "금투세로 간다면서 증권거래세를 쭉 낮춰왔는데, 결국 금투세는 도입하지도 않으면서 이른바 '단타'로 불리는 단기적 투기를 막던 거래세만 없앤 꼴"이라며 "대형 기관 투자자들의 매매를 규제할 장치만 없어져서 향후 한국 주식시장이 더욱 투기적 시장으로 바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금투세를 도입하면 시장의 큰손이 떠난다거나 사모펀드 감세가 이뤄진다고 우려하는데, 주식형 사모펀드로서는 증세인 셈이고 대부분의 대형 주식투자자들은 경영권 확보 등의 문제로 한국을 떠나기 쉽지 않다"며 "주식 시장 상황이라는 단기적 이벤트 때문에 금투세를 폐지하면서 정부의 세수 곳간은 구멍이 뚫리고, 그 이익은 슈퍼 부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연합뉴스국민 여론이나 부작용 등을 고려해 금투세를 폐지하는 방향이 맞더라도, 민주당의 입장 변화가 '너무 늦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 집권 시절에 추진했던 법안을 되돌린다는 정치적 책임에 눌려 결단을 내리지 못한 바람에 쓸데없이 시장의 불안만 키웠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금투세 시행을 반대했던 한성대학교 경제학과 김상봉 교수는 "시점상 지난 8월에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며 "그동안 시장의 불확실성만 계속 키워왔으니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다음 대선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한 후, 증시가 회복되면 금투세를 다시 추진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상인 교수는 "이 대표가 금투세 유예를 처음 거론했던 경선 당시에는 주식 시장이 지금처럼 침체되지도 않았다"며 "애초부터 경제 정책이 아닌,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며 금투세를 폐기하려던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이 대표와 민주당이 그동안 종부세 등을 거론하는 흐름을 보면 갈수록 현 정부의 경제 정책과 차별점이 없어지고 있다"며 "경제 부문에 있어 더 이상 금투세와 같은 대규모 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상실했다고 본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