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민 보건복지부 의료체계혁신과장이 21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혁신적 의료공급 및 이용체계 개편방안 공청회에서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및 의료공급체계 개편방안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연합뉴스"(환자들이) 대형병원에 왜 몰려들까에 대해 고민해 봤을 때 (그 답은) '의료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정보가 없다. 그래서 나에게 적합한 병원 진료과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가 아닐까요). 그냥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이름난) 대형병원에 가는 편이 이용자로서는 편익이 더 큰 것 같다는 거죠." 국내 의료체계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돼온 '빅5' 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은 어디에 기인할까.
국민 '10명 중 7명' 이상(74.7%)은 '의사 실력'을 첫 손에 꼽았다. 소비자시민모임 윤명 사무총장은 21일 보건복지부 주최로 열린 '혁신적 의료공급 및 이용체계 개편방안' 공청회에서 발제자로 나서 이 같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의료이용 행태 조사결과(2019)를 인용했다.
왜 무조건 '빅5'?…"합리적 의료이용 도울 가이드 부재"
대형병원 외래를 이용한 환자 중 진료 받은 질환으로 다른 병원을 이미 내원한 적이 '있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68.9%에 달했는데, 이 중 8할 이상(86.4%)은 동네 병·의원을 먼저 방문한 뒤 해당 상급종합병원으로 옮겨간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등으로 '환승'한 또 다른 이유로는 △병원의 유명세(67.3%) △시설·장비(54.8%) △이송 의뢰(35.9%) △가까워서(15.8%) 등이 언급됐다.
윤 사무총장은 이에 더해 소비자시민모임이 올 2월 의대 증원 발표 이후 촉발된 의료공백 사태 이후 전국 20대 이상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료이용 관련 소비자 인식조사 결과도 공유했다(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0%p).
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2.6%는 의·정 사태 이후 병원 이용에 불편을 겪었다고 답했다. 또 58.7%는 '의료서비스 질이 (더) 나빠졌다'고 느꼈고, '의료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할까봐 불안하다'는 비율은 88.4%에 달했다. 큰 병원 내원이 녹록지 않아 다른 병원을 알아보고 있다는 답변도 절반을 넘겼다(53.8%).
소비자시민모임 윤명 사무총장 발제자료 중 일부. 보건복지부 제공무엇보다 설문에 응한 대부분은 최우선 의료개혁 과제(복수응답)로 '필수의료 부족'(20.9%)과 '지역 간 의료자원 불균형'(18.6%)을 지목했는데, 이는 개별 차원의 서비스 이용에 주로 초점을 맞췄던 과거와는 구별되는 변화란 게 윤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이제는 종전의 의식주(衣食住)를 넘어
'의(醫)'식주 시대라 할 만큼 국민들이 의료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고, 구조적 문제와 결부된 정책에 대한 관심도 폭증했다고 봤다.
또 급속한 고령화 등과 맞물려 치료보다 '예방'이 핵심적 의제로 부상한 점,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의료의 공공재적 성격을 국민 대다수가 인식하게 된 점 또한 유념할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윤 사무총장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의 수혜자가 지금 이 순간의 환자(有病者)뿐 아니라 '잠정적 치료대상'인 의료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소비자로서 권리의 핵심이 '누구나 차별 없이 의료 혜택을 누리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보건당국은
소비자가 본인의 건강관리를 위해 적정 의료기관을 선택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책무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소위 '이름값'이 병원 선택의 척도가 된 현실에는
의료정보의 홍수에도 각 질환과 중증도에 맞는 종별 기관 매칭을 도울 '가이드'는 부재한 상황이 한몫했다는 진단이다. 필수의료 확충과 더불어 건강보험의 재정건전성을 강조해온 정부가 '과다 의료이용' 방지를 위해서라도 진료·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한 사전 설명이 적확히 이뤄지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이를테면 올해부터 보고 의무가 의원급 등 모든 의료기관으로 확대된 '비급여 진료항목' 등을 공개하는 데 그치지 말고, 환자의 행선지를 실제로 바꿀 수 있을 만큼의 다층적 정보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의료기관과 거주지와의 거리, 대중교통 이용 가능성 등까지 고려한 세부정보도 제공돼야 한다고 윤 사무총장은 지적했다. 그는 "최근 진료예약 관련 상담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시스템을 어떻게 활용하면 대기시간을 줄일 수 있는지 등의 정보가 필요할 것 같다"며 "취약계층 등 일부 환자들은 이런 점 때문에 내원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정기적인 국가건강검진 등 가용한 정부 의료지원정책 역시 보다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응급실 무분별 이용·'대형병원=최고' 인식 바꾸려면 원팀 돼야"
이와 함께 의료소비자 스스로도 보건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때 자신의 건강과 상태를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확인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고 밝혔다.
다양한 경로로 습득한 의료정보를 토대로 '합리적 의료이용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서비스 관련 피드백을 통해 의료기관의 서비스 질 개선에 기여하는 것도 더 나은 의료를 위한 소비자의 역할이라고 봤다.
윤 사무총장은 "무분별한 응급실 이용이라든지, 무조건 대형병원이 최고라는 인식의 개선이 필요하고, 이는 아주 장기간에 걸친 노력에 의해서 바뀔 수 있다"며 "또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신뢰하는 의료이용 문화를 형성해야 된다.
의료개혁은 의료계와 의료소비자, 정부가 '원팀(one team)'이 돼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패널로 참여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도 "예전부터 환자는 왜 가까운 동네 병원 놔두고 서울에 가느냐, (왜) 돈 많이 드는 상급병원을 가느냐고 하는데 '잘 몰라서' 그런다"며 "환자들에게 의료기관과 의료인을 제대로 선택할 수 있는 정보를 주고 활용할 여건을 만들어 준다면 (의료체계 문제의) 반 정도는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거들었다.
상급종합병원 인력의 40~50%를 차지해온 전공의에서 전문의로 중심축을 옮기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을 앞둔 정부가
공급자 관점의 구조 개혁뿐 아니라, 수요자의 주체적·합리적 이용을 유도할 의료정보 도구체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다.
정부 "3년간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전공의 비중 40→20%"
노연홍 의료개혁특위 위원장이 21일 혁신적 의료공급 및 이용체계 개편방안 공청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복지부는 상급종합병원을 중증환자 진료 중심으로 개편하겠다며 올 하반기부터 3년간 관련 시범사업을 시행한다는 계획을 거듭 밝혔다.
의사인력의 40%인 전공의 비중을 20%로 대폭 줄이고 전문의와 진료지원(PA) 간호사 등 숙련된 전문인력 중심으로 운영하되, 크게 △진료 △진료협력 △병상 △인력 △전공의 수련 등 5대 분야 위주로 혁신에 착수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현재 청구단위 기준 전체 39% 정도인 중증환자 비율을 시범사업 기간 내 60%로 끌어올리겠다는 게 정부의 목표다. 또 상급종합병원의 일반병상을 감축해 중환자병상 비중이 높을수록 더 많은 성과보상금을 가져가도록 설계하겠다고 전했다.
유정민 복지부 의료체계혁신과장은 "상급종합병원이 기존처럼 진료량을 늘려서 수익을 추구하는 구조가 아니라 중증환자를 잘 볼 수 있는 환경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상방안 개편도 같이 (논의)하는 중"이라며
"총 3조 원 내외에서 투자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상일 울산의대 교수는 "(상급종합병원 등 의료기관들은) 전체 시스템 내에서 물고 물리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에 (기존 체계를) 바꿔나가면 애초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며 "제도 설계 시범사업을 해나가면서 촘촘히 관련 모니터링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울러 "상급종합병원 진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구조 외 이용자 측면에선 뭐가 바뀌는지에 관한 내용이 (정부)계획안에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며 "제도 변화 등을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등의 수용성 등 이용자 시각에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