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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바꿔가며 '합의 종용'… 유족들 "사람으로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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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고용노동부의 산업재해 현황 분석 자료를 보면 2013~2022년 이른 아침 출근한 노동자들 가운데 2~3명은 끝내 귀가하지 못했다. 산업현장에서의 죽음을 멈추자는 취지로 2년 6개월 전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 무력화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경영자들이 안전에 대한 투자보다 '자기 보전'에 대한 지출에 집중한 탓이다. 그들 뒤에는 이른바 '법기술자'들의 조력이 있었다. CBS노컷뉴스는 중처법의 현실과 개선점을 짚어본다.

[법기술자에 짓밟힌 중처법③]
사측 "늦어지면 변호사비만 더 들어…"
반복적인 합의 종용…치 떨리는 유가족
유가족 "사과도 없이…사람 맞나?"
중처법 선고 17건 모두 유족 합의 '감경'
"오너 직접 나서는 것 극도로 꺼려…금전적 해결"
아리셀 유족들 "최소 10차례씩 합의 요구 받아"
"유족에 직접 연락…변호인 윤리규정 위반"

▶ 글 싣는 순서
①2.5년간 대기업 기소 단 한 건…무력화된 '중처법'
②소극적인 檢+관대한 法…중처법, 대형로펌에는 '잭팟'
③매일 바꿔가며 '합의 종용'… 유족들 "사람으로 안 보여"
(계속)
스마트이미지 제공스마트이미지 제공
"빨리 합의하시죠…".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아내의 가슴에 또다시 비수가 꽂혔다. 남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사측 노무사는 '합의서'부터 내밀었다.  

유가족 "사과도 없이…사람 맞나?"


이동우씨의 고 이동우 동국제강 비정규직노동자 산재사망사고 해결 촉구지원모임'이 대구지법 포항지원 앞에서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이동우씨의 고 이동우 동국제강 비정규직노동자 산재사망사고 해결 촉구지원모임'이 대구지법 포항지원 앞에서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2022년 3월 21일, 동국제강(현 동국홀딩스) 포항공장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던 이동우(사망 당시 38세)씨는 크레인 보수 작업 중 크레인이 작동하면서 안전벨트에 몸이 감겨 사망했다.

조사 결과 사고 당시 현장에는 크레인의 작동을 멈출 신호수도, 안전관리자도 없었고, 이씨에게는 위험을 알릴 무전기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명백한 안전관리 미비로 인한 '중대재해'였다.

이씨의 아내 권금희(42)씨는 "남편이 안전벨트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사고를 당했다는 말까지 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고 했다.

더욱이 슬픔에 잠겨있던 권씨를 분노케 한 건 줄기차게 요구해오는 사측 합의 종용이었다. "괜히 늦어지면 변호사 비용만 더 드니까 빨리 합의하자"는 사측 관계자의 말은 사람의 소리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것도 원청인 동국제강은 하청업체 뒤에 숨어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권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결국 권씨는 서울까지 올라가 홀로 동국제강 본사 앞에 천막을 쳤다. 남편의 영정은 장례식장이 아닌 천막농성장에 걸렸다.

농성 3개월, 그제서야 회사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임신 상태였던 권씨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권씨가 요구했던 '대표이사 사과'는 회사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일주일 게시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합의했다. 또다시 남편과 같은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재발방지 대책 수립도 약속받았다.

권씨는 눈물을 머금고 '민사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권씨는 합의서를 움켜쥔 채 남편 앞에서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권씨는 "끝까지 싸우고 싶었지만,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를 위해 그럴 수 없었다"며 또다시 흐느꼈다.

권영국 중대재해네트워크 공동대표(변호사)는 "사측 변호인의 최우선 목표는 피해자의 '사정이나 유족의 슬픔이 아닌 기업 오너의 안위"라며 "오롯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위해 활동한다"고 말했다.

'유족 합의' 중처법 사건 17건 중 15건 '집유'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처법) 위반 기업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유족과의 합의'가 필수다. 재판 과정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양형 조건이기 때문이다.

중처법 시행 이후 이뤄진 17건의 선고 중 15건에서 법원은 '유족과 합의'한 기업 대표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특히 골판지 가공 기계의 회전축에 몸이 끼여 노동자가 즉사한 '삼성포장' 사건(13호 선고)은 '유족 합의'가 업체 대표 감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 잘 보여준다.

이 업체에서는 해당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5차례나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다. 이번 사건도 기본적인 안전 의무인 '기계 방호덮개'가 설치되지 않아 발생했다. 역시 중대재해였지만 법원은 '유족과의 합의, 처벌 불원' 등의 이유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주희(법무법인 다산) 변호사는 "양형의 감경 요소 중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이 피해자 또는 유족과의 합의"라며 "초호화 변호인단은 이런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복적인 합의 종용…치 떨리는 유가족


고 강보경씨의 어머니 이숙련씨와 누나 지선씨가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고 강보경씨의 어머니 이숙련씨와 누나 지선씨가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감형을 노린 무리한 합의 요구로 인한 2차 피해는 고스란히 유가족들의 몫이다.

지난해 8월 11일, 부산의 DL이앤씨 시공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 6층에서 파손된 유리창을 교체하던 중 창틀과 함께 추락해 사망한 강보경(사망 당시 29세)씨의 유족들도 사측 변호인단의 비인간적인 행태에 고통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을 해온 아들과 동생을 잃은 어머니 이숙련(71‧여)씨와 누나 강지선(34‧여)씨 역시 사측의 합의 종용에 시달렸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유족분들께도 나쁜 조건은 아닐 거다"라며 합의서를 내밀던 사측 노무사를 보며 지선씨는 "사람이 맞나하는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

합의를 거절하자 사측은 사람을 바꿔가며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합의를 요구했다. 이씨와 지선씨의 의지가 꺾이지 않자 사촌을 유족 대표로 세워 합의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지선씨는 "회사측은 우리가 법률대리인을 선임하기 전까지 하루에 한 번씩 전화나 문자를 보내면서 우리를 괴롭혔다"며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에 더욱 화가 났다"고 토로했다.

이후 유족들은 '책임자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합의조건으로 내걸지만, 사측은 황당하게도 '대표이사 사과' 대신 '합의금 인상'을 제시했다.

권영국 공동대표(변호사)는 "유족들은 책임자 즉 대표이사의 사과를 요구하지만 사측에서는 오너가 직접 나서는 상황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다"며 "대신에 유족들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이용해 금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유족에 직접 연락…변호인 윤리규정 위반"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공장인 아리셀에서 박순관 에스코넥 대표가 23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공식 사과문을 낭독하고 있다. 화성=박종민 기자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공장인 아리셀에서 박순관 에스코넥 대표가 23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공식 사과문을 낭독하고 있다. 화성=박종민 기자
중처법 시행 이후 최악의 인명피해로 기록될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들도 '김앤장'이라는 국내 최대 로펌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개개 유가족별로 사측의 합의와 처벌불원서 요구는 이미 시작됐다. 한 가족당 최소 10차례 이상 사측으로부터 합의 요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 박창선씨는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사후 처리가 하나도 되지 않고 있어 열불이 난다"며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문자가 계속 온다"고 하소연했다.

신하나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법률지원단장은 "아리셀 측 변호사들은 유가족들에게 대리인이 있음을 알면서도 유가족들에게 직접 접촉하고 있다"며 "대리인이 있는 상대방에게 직접 연락하는 행위는 변호사의 윤리규정 위반"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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