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 연합뉴스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83)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가 지난 5일 개막했다. 반세기에 걸쳐 작업한 60여 개 프로젝트의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500여 점을 총망라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례적으로 조경가의 전시를 개최하는 이유가 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1호 졸업생(1975)이자 국내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1980)인 작가는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을 설립(1987)한 이후 굵직한 프로젝트를 도맡다시피 했다. 예술의전당(1988), 호암미술관 '희원'(1997),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2007), 선유도공원(2001), 서울식물원(2014) 등이 모두 작가의 손을 거쳤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인문학 레지던시 두내원은 내년에 문을 열 예정이다.
지난 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만난 작가는 "조경가인 제가 이곳에서 전시를 하다니 황홀하고 기적 같다"며 "조경은 건축의 뒷전으로 여겨지는데 후배들에게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라도 전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호암미술관 희원 식재 현황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조경가로서 전환점이 된 작업은 호암미술관 '희원'이다. 이전까지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대전 엑스포 '93 박람회장 등 국가주도 대형 공공 프로젝트를 주로 맡았던 작가는 '희원'을 조성할 때 한국의 전통정원 요소를 적극 활용했다.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근본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희원은 차경(借景·주변의 경치를 빌려옴)의 원리를 기반으로 우리나라의 다양한 자생식물을 심었어요. 우리나라는 산천 그 자체가 하나의 정원일 정도로 아름다워서 담장을 낮게 해 주변의 경관을 끌어들이는 거죠. 정원의 정자 역시 두드러지지 않고 가장 좋은 경관을 살며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요."
작가의 경기도 양평 자택에는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키우는 실험실이 있다. 토종 야생화와 들풀을 직접 가꾸고 이해한 다음 자신의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것이다. 환경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방문한 독일 국제가든쇼가 자생식물을 심어 자연주의 정원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가든쇼 내 한국 정원에 개나리, 원추리, 진달래 밖에 없었어요. 그때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널리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조경가는 건축가의 뒷전이 아니"라는 작가의 말처럼 조경가와 건축가가 협업해 탄생한 작업도 살펴볼 수 있다. 조민석 건축가가 지은 제주 오설록 4개 건물은 제주 특유의 오름 지형과 곶자왈 숲을 만끽하도록 했다. 남해 사우스케이프는 건물 사이 돌산을 깎은 후 돌 틈에 풀을 심었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여의도샛강생태공원과 선유도공원은 대표적인 한강 생태권 프로젝트다. 국내 최초 생태공원인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하마터면 축구장과 주차장으로 사용될 뻔했다. 기겁한 작가는 담당 공무원들을 찾아갔고 김수영의 시 '풀'을 읽어주며 설득해 습지를 지켜냈다. 시민들에게 생활수를 공급하던 정수장이 수생생물을 통한 자연정화 장소로 변모한 선유도공원은 도시 산업화의 흔적을 자연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미술관 전시마당 정원. 연합뉴스 이번 전시의 백미는 미술관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에 새로 조성한 정원이다. 전시마당은 돌산인 인왕산의 힘찬 생명력을 담아내듯 언덕과 자연석을 배치했고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심었다. 종친부마당은 기존 보행로를 걷기 좋게 만들었고 담장을 낮춰 인왕산으로 초대받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어릴 적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백일장에 나갔다 하면 장원을 차지했다. 국어교사였던 아버지의 동료교사 박목월 시인이 아꼈을 정도다. 영문과 4년 장학생 입학을 포기하고 단식투쟁을 하며 농대를 선택할 때도 박 시인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일등공신은 박목월 선생이에요. 지금도 박 선생의 시집을 보면 눈물이 나요. 예나 지금이나 박 선생의 시에서 거의 대부분의 영감을 얻습니다."
두내원 스케치.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조경가 정영선 개인전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