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와 무승부를 거둔 대표팀. 연합뉴스무색무취 그 자체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어떤 축구를 구사하려는지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은 손흥민(토트넘),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파리 생제르맹) 등 유럽 빅클럽에서 뛰는 주축들을 앞세워 역대 최고 전력을 자랑한다. 이에 클린스만 감독은 6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을 호언장담했다.
우승을 향한 첫 관문은 통과했으나, 그 과정은 찝찝했다. 조별리그 3경기에서 한국이 보여준 경기력은 우승 후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무기력했다.
공격은 무디고 수비는 불안했다. 조별리그 E조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23위로 바레인(86위), 요르단(87위), 말레이시아(130위)에 비해 월등히 높지만 전혀 압도하지 못했다.
1차전에서는 바레인을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며 순항을 알렸다. 하지만 멀티골을 넣은 이강인만 돋보인 경기였고, 나머지 선수들의 활약은 미비했다. 특히 최전방에서 득점을 책임져야 할 조규성(미트윌란)이 여러 차례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삼켰다.
공격의 문제점은 곧바로 요르단과 2차전(2-2 무)에서 드러났다. 저돌적인 돌파로 페널티킥을 얻어낸 손흥민이 득점에 성공했으나 이후 번번이 역습을 허용해 위기에 몰렸다. 결국 내리 2골을 내줬고, 후반 추가시간 상대 자책골을 유도한 황인범(즈베즈다)의 슈팅으로 간신히 패배를 면했다.
말레이시아와 3차전에서는 나름 공격에 변화를 줬다. 1, 2차전에서 황인범과 중원을 이룬 박용우(알아인) 대신 정우영(슈투트가르트)를 내세워 공격을 강화했다. 하지만 공격 숫자만 늘어났을 뿐, 세밀함은 여전히 부족했다.
고개 숙인 손흥민. 연합뉴스오히려 수비에서 불안 요소를 드러내 졸전을 거듭했다. 황인범이 홀로 중원을 지켜 수비 부담이 높아졌고, 설영우(울산 HD)와 김태환(전북현대) 풀백들도 상대 역습에 대비하느라 공격에 가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조별리그 역대 최다 실점의 불명예를 남겼다. 유럽 정상급 수비수로 인정받은 김민재가 있음에도 조별리그 3경기에서 6실점을 했다. 종전 기록은 1996년 아랍에미리트(UAE) 대회의 5실점이다.
뚜렷한 전술 없이 선수들의 개인 역량에만 의존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손흥민, 이강인의 드리블을 통한 공격 기회 창출만 눈에 띄었다. 클린스만 감독이 화려한 라인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셈이다.
'주장' 손흥민은 에이스인 만큼 모든 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다. 최전방 공격수와 측면 공격수 등 프리롤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 중인데, 손흥민이 막히면 이에 대한 대안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클린스만 감독은 "손흥민이기 때문에 그런 견제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상대의 밀집 수비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져갔음에도 공격은 여전히 무뎠다. 이는 득점 유형에서도 엿볼 수 있다. 65.8%의 점유율을 점한 요르단과 2차전, 점유율 81.2%를 기록한 말레이시아와 3차전 2경기 연속 필드골을 단 한 개도 넣지 못했다.
손흥민 역시 아직 필드골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다. 요르단과 2차전, 말레이시아와 3차전에서 각각 1골씩 넣었는데 모두 페널티킥 득점이었다. 클린스만 감독은 아직 손흥민 활용법을 찾지 못한 모습이다.
반면 조별리그 6실점 중 필드골로 4골을 허용했다. 특히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최약체' 말레이시아에 3골 중 2골을 필드골로 내줬다. 한국보다 말레이시아의 공격이 더 날카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소 짓는 클린스만. 연합뉴스클린스만 감독은 늘 선수들의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이재성(마인츠)는 "감독님이 자유를 주셨고, 선수들끼리 경기 중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바꿔가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튀니지와 평가전에서 이강인이 이재성과 자리를 바꾼 뒤 2골을 터뜨렸다.
아무리 선수들이 뛰어나도 감독이 짚어줘야 할 부분이 있다. 특히 전술에 대한 결정까지 선수들이 스스로 내린다면 감독은 무의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클린스만 감독은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맡기기만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여기에 태도 논란까지 일고 있어 확실한 결과가 필요하다. 클린스만 감독은 줄곧 실점 상황에서도 웃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팬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말레이시아와 졸전 끝에 무승부를 거둔 뒤에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였다"고 말해 뭇매를 맞았다.
조별리그에서 여러 문제점을 노출한 클린스만 감독은 변화를 예고했다. 그는 "전술적인 부분은 선수들과 신중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다"면서 "역습, 수비 과정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고, 모두 보완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고 밝혔다.
16강부터는 패하면 곧바로 짐을 싸야 한다. 클린스만 감독의 말처럼 달라진 한국 축구를 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호언장담한 우승 염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더이상 지휘봉을 잡을 자격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