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지수 ELS 피해사례 발표. 연합뉴스 홍콩 HI지수가 고점이었던 2021년 초 A(48)씨는 6억원을 투자,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에 가입했다. 은행 직원의 "주식보다 안전하다. 지금 예금을 들면 바보다"란 말이 결정적이었다. 회사일로 2년동안 해외로 거주지를 옮기며 생긴 뜻밖의 여유자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머릿속에 긍정회로만 돌아간 것처럼 위험은 낮은데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바보같은 선택이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홍콩H지수가 내년 만기까지 반등하지 못하면 그 역시 투자금의 절반 가까이를 날리게 됐다.홍콩 ELS 원금 손실 사태가 금융권의 큰 문제로 떠오른지 오래다. 이미 증권사에서 100억원, 은행권에서 1천억원대의 손실이 확정된데다 올해 5조원대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어 대규모 원금손실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을 전망이다. 금융투자업계는 잔뜩 긴장한 모양새다. 고위험상품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개인에게 있지만, 부실 판매 정황도 드러나며 금융당국이 나선 상태이기 때문이다.
연말 5조원 손실 발생 가능성까지…투자자들 '피눈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홍콩H지수가 1만 2천 대까지 올랐던 2021년에 판매된 홍콩 H지수 ELS 가운데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상품은 10조 2천억원에 달한다. ELS는 가입 후 3년 만기로 판매되는 것이 통상적이라,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수익이 확정된다.
ELS 상품은 구조상 이례적인 지수 폭락만 없으면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지금은 홍콩 H지수가 5천 선으로 떨어져 가입 당시보다 절반 이상 폭락한 상태다. 이 때문에 상반기에만 원금 손실 규모가 5조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미 올해 들어 지난 12일까지 국민‧신한‧농협‧하나‧우리 등 5개 은행에서 판매한 홍콩 H지수 ELS 중 2105억원 어치가 만기를 맞아 1067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증권사 역시 미래에셋증권‧NH투자증권‧하나증권‧KB증권이 판매한 홍콩 H지수 ELS도 지난 9일까지 150억원의 손실이 났다. 지난해 하반기 확정된 손실액 82억원을 더하면 관련 상품의 원금 손실액은 이미 1천억원을 넘어섰다.
투자자들은 "당했다"는 입장이다. 또다른 투자자 B씨는 "은행원이 중국 경제를 고려하더라도 상품 안전성에 크게 문제가 생길리가 없다며 권유했는데, 반토막이 난 것을 보니 속이 너무나 쓰리다"고 말했다.
약 3억원을 투자했다는 C씨는 "은행의 영업 경쟁에 놀아난 것 같아서 한심스럽다. 중간에 해약하려다가 못했는데 나중에 손실이 커지니까 해약하라는 전화가 오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급기야 ELS 손실을 입은 투자자들은 'ELS 가입자 모임'을 결성해, 불완전판매를 규탄하는 금감원 앞 대규모 집회 등을 가지며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19일에도 여의도 금감원 앞에서 원금 복원과 피해보상 촉구를 위한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불완전판매' 논란 다시 불붙을 듯…투자자 본인 책임도
연합뉴스투자자들은 은행들이 불완전판매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은행들은 비이자이익 확대 정책을 펼치면서 금융상품 판매를 늘리는데 집중했다. 지난해 3분기까지 5대 은행은 ELS를 포함한 신탁수수료로 전년대비 11% 증가한 약 7200억원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더해 성과측정지표 중 ELS 판매에 높은 가산점을 부여하면서 영업 경쟁을 더욱 부추겼다. 주요은행들은 1000점 중 300~440점을 ELS 등 금융상품 판매실적에 배정했는데, 반면 불완전 판매 방지 관련 점수는 최대 100점에 불과했다.
앞서 박충현 금감원 부원장보는 "국민은행의 경우 변동성이 30% 이상 확대되면 자체적으로 한도 내 목표 금액의 50%만 판매하겠다고 내부 규정에 정했는데 2021년에 많이 팔리니까 그것을 80%까지 끌어올려서 판매한 사례가 발견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상 은행권 KPI가 1000점 만점인데 고위험 ELS나 주가연계신탁(ELT) 상품 판매와 관련해서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는 주요 지표 점수 비중이 30~40% 정도 된다. 특히 국민은행의 경우 1000점 만점에 약 410점이 ELS 판매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투자자들의 항의는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5대 은행에 1400여 건의 민원이 접수된 상태다. 가입자 5명 중 1명이 고령층이고, 투자자 대부분이 "손실이 없다"는 안내를 받고 가입했다며 불완전판매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투자자 대부분이 재투자였다는 점에서 투자자 역시 손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홍콩 H지수 ELS에 투자한 계좌 40만개 가운데 유사상품 투자 경험이 없는 계좌는 8.6%인 3만 여개로, 대부분이 수익을 따져 재투자를 결정한 경우로 분석된다.
손실배상 어떻게 할까…숨죽인 금투업계
스마트이미지 제공금융당국은 판매사들이 법을 어긴 것은 없는지 꼼꼼히 들여다본다는 입장이다. 금감원은 H지수 연계 ELS 주요 판매처인 은행‧증권사 12곳에 대한 현장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오는 3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앞서 이복현 금감원장은 "불확실성을 오래 두는 것은 금융당국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2~3월이 지나기 전에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고위험 상품에 대한 관리·감독 문제가 제기되자 투자자보호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지난 2021년 3월부터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을 시행했다. 금소법에 따르면 금융투자사업자는 금융투자상품 판매 시 △설명 의무 △적합성 △적정성 △불공정 영업행위 금지 △부당권유행위 금지 △허위·과장광고 금지 등 6가지 의무를 지켜야 한다.
은행 등 판매사들은 투자자들의 재투자율이 대부분이었다는 점 등을 들며 불완전판매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절차를 따져봤을 때 불완전판매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재투자율이 높았기 때문에 투자 상품에 대한 정확한 인식없이 가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최근 은행들은 살얼음판이다. 금감원도 은행을 중점적으로 검사하고 있다보니 피해가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불완전판매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관건은 '적합성'이다. 재가입률이 높았다는 점에서 "원금 손실 가능성을 몰랐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지만, '고위험 상품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판매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해봐야 된다는 것이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실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고령자 중에서 일부는 위험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ELS 자체가 적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외에서도 ELS상품을 판매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일반 투자자들에게 이렇게 많이 단기간에 판매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이복현 금감원장도 지난해 말 "고위험‧고난도 상품이 은행 창구에서 고령자에게 특정 시기에 몰려서 판매됐다는 것만으로 적합성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의구심이 있다"며 "설명 여부를 떠나 권유 자체가 적정했는지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