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 금동마을 주민들은 한동안 무덤 사이 여유 공간에 가마니와 거적 등으로 임시 거처를 마련해 피난민처럼 생활했다. 주민대표 김창수씨 제공약 50년 전인 1976년 전북 김제시 금동면에 살던 주민들이 화전민으로 내몰려 인근 공동묘지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에 대한 사전 조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번 조사를 통해 정부가 공동묘지 강제 이주 사건의 책임을 인정한다 해도 피해 주민을 위한 적절한 보상은 어려워 보인다.
10일 전라북도 등에 따르면 김제시와 산림청은 김제 공동묘지 강제 이주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국가기록물 등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이번 사전 조사는 국민권익위원회의 정식 조사 전 단계로 김제시가 피신청인, 산림청이 관련기관으로 지정됐다.
그런데 이번 조사를 통해 정부가 공동묘지 강제 이주 사건의 잘못을 인정한다 해도 피해 주민들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기는 어렵다.
피해 주민들은 정부의 공식 사과는 물론, 강제 이주 당한 뒤 새로이 삶을 이어간 김제시 성덕면 개미마을의 토지와 주택의 무상 양도를 요구해 왔다.
당시 정부가 이들을 이주시킬 것이라는 언론 보도는 물론, 김제군이 공동묘지 토지를 주민에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한 1976년과 1991년의 '공문서'도 남아있는 상황이다.
1976년 김제군 공문(좌), 1991년 김제군 문서(우)에는 금동마을 이주민에게 대토 지원을 한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주민대표 김창수씨 제공 그러나 피해 주민들은 무상 양도가 아닌,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공시지가 수준으로 주택 등을 매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행법상 공유지를 무상으로 일반에 양도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주민대표 김창수(79)씨는 "1976년 당시에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다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면 타당성이 없겠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토지나 주택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제시 등은 '무상으로 주라는 법이 없다'는 입장"이라며 "당시 양도한다는 증거가 있는데 현행법 때문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산림청은 피해 주민들이 그동안 강제 이주 사건과 관련해 모아온 사진과 서류 등을 '유네스코 기록물로 등재해 달라'는 요구도 사실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산림청은 국토녹화 50주년을 맞아 성공적인 녹화산업의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한 상황이다.
김제 공동묘지 강제 이주 사건은 지난 1976년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뒤 금동마을 32가구, 100여 명이 화전민으로 몰려 성덕면 공동묘지로 내쫓긴 일을 뜻한다.
1976년 김제시 성덕면 공동묘지로 내쫓긴 주민들이 임시로 움막을 짓고 생활하고 있다. 주민대표 김창수씨 제공 정부는 화전정리법에 따라 △경사도 30도 이상 △도립공원인 금산사 경관 저해 등 이유를 들어 마을 철거를 강행했다.
당시 마을주민은 "마을의 역사가 100년이 넘고 뽕밭을 일구거나 약초를 재배하는 등 화전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은 무덤 사이에서 가마니로 움막을 짓고 살았으며, 생존을 위해 구걸도 해야 했다. 주민들은 공동묘지 위에서도 열심히 살아보자며 스스로를 '개미'라 부르며 개미마을을 일궜다.
20~30살의 나이에 움막 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은 수십 년의 한과 설움을 간직한 채 아직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앞서 CBS노컷뉴스는
[왜 우리를 공동묘지로? …무덤과 동거, 짓밟힌 인권],
["땅 준다며 내쫓더니…" 임대료는 챙기면서 보상은 나 몰라라(?)],
['밀어붙이기식 화전정리', 행정도 '우왕좌왕'],
['화전정리사업'의 빛과 그림자… 우려가 현실로] 등 기사를 통해 '김제 공동묘지 강제 이주 사건'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