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본사 사옥. 연합뉴스 홍해발(發) 물류 대란으로 인해 잠잠했던 국제유가가 재차 꿈틀대는 가운데 중간배당 작업도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한국전력이 위기에 처한 모양새다. 누적 적자가 45조원에 달하는 한전은 내년 한전채권 추가 발행을 위해선 중간배당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선 원가주의에 입각한 전기요금 현실화라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정부와 에너지 업계 등에 따르면 한전은 연말까지 한국수력원자력을 포함한 발전자회사 6곳으로부터 약 3조5천억원에 달하는 중간배당을 요구했다. 당초 4조원을 요구했지만 적자에 허덕이는 자회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5천억원가량 낮춘 것이다.
한전은 한전채 발행 한도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연말까지 중간배당 작업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지난 11일 한수원은 중간배당 시행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사회를 열고 정관 개정안을 의결하는 등 자회사들의 정관개정이 이어지고 있다. 한 발전사 관계자는 이날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한전에서 연말까지 중간배당을 달라고 해서 이달 28일 이사회를 열고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실상 국내 전력 독점 기업인 한전이 자회사들에게 중간배당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제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발생하면서 발전사들의 재무상황도 좋지 않다는 점이다.
총부채만 200조원에 달하는 한전은 올 한 해만 추가 6조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등 누적 적자는 45조원을 초과할 것으로 보인다. 약 1조5천억원의 중간배당 요구를 받은 한수원 역시 올해 1~3분기까지 영업손실이 1600억원에 달한다.
서울시내 주택가 전기계량기 모습. 황진환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전이 자회사들에게 전례 없는 중간배당을 요구한 것은 최소한 생존을 위한 '빚'을 더 내기 위해서다. 현행법상 한전채는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5배까지 발행할 수 있다. 당초 한도가 2배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지난해 12월 여야가 한도를 5배로 확대하는 개정안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년이다. 추가 적자 폭이 줄어들긴 했지만, 전기요금 '역마진 구조'가 지속되면서 한전의 누적 적자는 매일 늘고 있다. 올해까진 채권 발행을 통한 빚으로 연명이 가능했지만,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지면 내년엔 빚조차 내지 못하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는 약 20조9천억원이었다. 이에 따라 합계 금액의 5배인 104조6천억원까지 발행이 가능했다. 그러나 올해 6조원 손실을 반영하면,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가 약 14조9천억원으로 줄어들고, 발행 한도 또한 74조5천억원으로 감소하게 된다.
이미 한전이 발행한 채권 잔액이 약 79조6천억원에 육박하고 있단 점을 감안하면, 내년엔 빚을 더 내기는커녕 이미 한도를 초과한 채권 약 5조원을 상환해야 하는 셈이다. 이같은 위기를 피하기 위해선 당장 전기요금을 인상하거나, 중간배당을 받아 적자 폭을 줄여 '자본금과 적립금'의 최대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채권 발행 한도를 확보하는 방안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원가 부담도 커지고 있다. 최근 홍해 인근에서 예멘 반군의 공격으로 인해 에너지 운송 대란 조짐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홍해를 통과하는 석유 운반선들의 이동이 지체되면서 잠잠했던 국제유가도 재차 들썩이고 있다.
지난 19일 기준 서부텍사스유(WTI)는 배럴당 73.94달러, 두바이유는 77.19달러, 브렌트유는 79.37달러 등을 기록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사이 전쟁으로 인해 지난 9월 한때 100달러에 육박했던 국제유가는 이달 초에는 60달러선까지 하락한 바 있다.
서울시내 한 주유소 모습. 황진환 기자전력생산의 주요 원료 중 하나인 석유 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서면 한전의 적자는 예상보다 더 커질 우려가 있다. 여기에 채권 발행 한도를 늘리기 위한 중간배당 작업도 순탄치 않게 흘러갈 경우, 최대 위기를 맞을 수 있는 상황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부‧여당이 사실상 전기요금 동결을 선언한 이상 한전채 발행을 위한 중간배당이 불가피하다는 게 중론이지만, 전문가들은 자회사로부터 중간배당을 받는 것은 조삼모사에 불과하다며 '원가주의'를 반영한 정면 돌파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미래에너지학과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중간배당 4조원은, 적립금과 자본금 합계의 5배를 곱하는 채권한도를 고려하면 사실상 한전에겐 20조원이 달린 사안"이라며 "일단 중간배당을 하면 내년 총선까진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해서 정부와 여당도 동의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결국 한전 입장에서 당장은 채권 발행이 도움은 되겠지만 연결 재무제표상으론 자회사 이익을 한전으로 갖고 오는 것이기에 조삼모사"라고 했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원가가 오를 때 전기요금을 동시에 올리고, 내릴 때 내리는 식의 원가주의를 외면했기 때문에 이같은 꼼수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