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의 '표적감사 의혹'을 수사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앞에 놓인 난제가 첩첩산중이다.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을 상대로 한 5차례의 출석 요구가 모두 거절됐지만 섣불리 체포영장 카드를 꺼내지 못하면서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이 와중에 뇌물 혐의를 받는 감사원 간부를 상대로 청구한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구속 필요성뿐 아니라 혐의 구성 논리가 모조리 깨졌다. 그러니 지휘부마저 영장 재청구에 "신중하라"는 분위기다. 임기를 두 달 남긴 김진욱 공수처장은 여운국 차장과 자신의 후임을 논의한 문자가 국회에서 들통나 빈축을 샀다. 안팎에서 총체적 난국인 셈이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공수처 특별수사본부(이대환 부장검사)의 유 사무총장 수사는 지난주 5차 통보가 거절된 이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공수처는 곧장 유 사무총장에게 추가 출석 요구를 하는 대신, 체포영장 청구 등 강제수사로 전환할지 여부를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 사무총장은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참석 등을 이유로 5차 출석에 불응하면서 내달 초 출석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조사 순서를 두고서도 "사무처 직원들 먼저 조사하는 것이 맞는다"는 취지 의견도 밝혔다. 공수처 관계자는 "유 사무총장 측과 조사 일정을 계속 협의 중"이라면서도 체포영장 청구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법조계에선 표적감사 수사가 소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본다. 공수처 지휘부 임기가 2개월여 남은 상황에서 이런 속도로 수사가 진행된다면 내년 1월 안에 수사 종결은 요원하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공수처가 최근 네 번째 구속영장을 기각당하면서 수사력 부족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출범 이래 공수처는 4번의 영장을 청구해 모두 법원에서 기각됐다. 이민수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8일 "직접 증거가 부족하고 뇌물액 산정도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뇌물 혐의를 받는 감사원 3급 간부 김모씨에 대해 공수처가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공수처는 구속영장 재청구 여부를 검토한다는 입장이지만 당분간은 쉽지 않아 보인다. "처장님 말씀대로 5번째 영장은 시기를 신중히 고려하겠다" 내용의 지휘부 문자가 지난 10일 언론에 그대로 포착됐다. 이 문자는 여 차장이 김 처장에게 보낸 텔레그램 메시지다.
특히 대화 중엔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 3명의 이름을 거론하며 특정 판사를 피해 청구 시기를 골라야 한다는 취지의 말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공수처는 뚜렷한 배경 설명 없이 매주 기자단을 상대로 진행하던 정례 브리핑마저 순연했다.
이 밖에도 김 처장과 여 차장 두 사람이 후임 공수처장을 논의한 대화가 언론에 잡히면서 적잖은 잡음을 냈다. 언론 카메라에 잡힌 메시지를 보면 김 처장과 여 차장은 판사 출신 법조인 실명을 거론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이 10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여운국 공수처 차장과 문자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김 처장은 '강경구, 호제훈은 저랑 친한데 수락 가능성이 제로입니다. 강영수 원장님도 수락할 것 같지 않습니다'라는 여 차장 문자에 '알겠습니다. 수락 가능성이 높다고 사람 추천할 수도 없고요 참'이라고 답했다. '차장 후보로 검사 출신은 오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판사 출신은 쉽지 않을 겁니다'라고도 했다.
법조인들은 공수처장이 스스로 자신의 후임을 알아본 것 자체가 위법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공수처장은 여야(각 2명)와 법무부 장관, 법원행정처장, 대한변협회장 등 총 7명으로 구성된 후보추천위원회에서 후보 2명을 추천해 대통령이 1명을 지명하는 식으로 인선 작업이 이뤄진다. 공수처장은 후임 인선에 관여할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다.
주요 수사 답보 상태에 지휘부 실책까지 엎친 데 덮친 공수처가 사정 기관으로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처장 임기 내 반드시 유의미한 수사 성과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공수처 안팎에서 나온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민주당이란 단골 고객이 없었다면 진작 망했을 가게"라면서 정치 편향성과 성과 부족을 꼬집었다. 이에 김 처장은 "올해 공소제기 요구 두 건 모두 문재인 정권 인사로 한쪽만 수사한 게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라면서 "최근 수사부장 진용을 갖추면서 뭔가 해보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연내 마무리해 말씀드릴 사건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공수처가 내년도 예산 중 형사보상금으로 신청한 5650만원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조정소위 논의 과정에서 "피의자 또는 피고인 등을 구속한 사례가 아직 없다"는 이유로 전액 감액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