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한선수가 14일 경기도 용인시 대한항공연수원 배구단체육관에서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올해 프로배구 남자부에서 한선수(38·189cm)만큼 빛난 선수는 없었다. 소속팀 대한항공의 3시즌 연속 통합 우승, 왕조 구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여기에 남자부 최초 세터 및 역대 최고령 최우수 선수(MVP)로 V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며 완벽한 시즌을 보냈다.
2022-2023시즌 대한항공은 지난해 8월 '2022 순천·도드람컵 프로배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도드람 2022-2023 V리그' 정규 시즌과 챔피언 결정전까지 모두 제패해 트레블을 달성했다. 동시에 3시즌 연속 통합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모두 삼성화재에 이은 남자부 2번째 대기록이다. 삼성화재는 2009-2010시즌 트레블, 2011-2012시즌부터 2013-2014시즌까지 3시즌 연속 통합 우승을 거둔 바 있다.
그 중심에는 한선수가 있었다. 배구에는 '세터 놀음'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공격수여도 정확한 토스를 받지 않는다면 제대로 스파이크를 구사하기 어렵다. 올 시즌 대한항공의 우승은 한선수의 정교한 토스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선수는 매 경기 노련한 경기 운영을 선보여 대한항공의 고공비행에 앞장섰다.
이런 활약을 통해 올 시즌 남자 배구의 새 역사를 썼다. 줄곧 날개 공격수의 몫이었던 남자부 정규 리그 MVP를 세터 최초로 수상했다. 기자단 투표 31표 중 19표를 얻어 OK금융그룹 레오(6표), 대한항공 정지석(4표), 현대캐피탈 허수봉, 대한항공 임동혁(이상 1표)를 제쳤다.
챔피언 결정전 무대에서도 역시 빛났다. 2017-2018시즌에 이어 두 번째 MVP 영예를 누렸다. 1985년생인 한선수는 정규 리그와 챔피언 결정전 모두 남녀부를 통틀어 최고령 MVP 수상자가 됐다. MVP 동시 수상은 역대 남자부 9번째다.
하지만 한선수는 개인 수상보다 팀의 우승에 더 기뻐했다. 그리고 14일 경기도 용인시 체육관에서 진행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다음 시즌에도 대한항공을 정상에 올려놓겠다는 굳은 각오를 밝혔다. 남녀부 역대 최다인 4시즌 연속 통합 우승에 도전하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드러냈다.
대한항공 한선수가 14일 경기도 용인시 대한항공연수원 배구단체육관에서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MVP, 무조건 공격수가 받는 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즌을 마친 뒤에도 한선수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장 빛난 별로 떠오른 만큼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오는 5월 14일부터 21일까지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리는 아시아클럽선수권 대회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 이 대회는 아시아 각국 리그의 우승 팀만 참가한다.
한선수는 "일정이 빠듯해서 아직 쉬지 못하고 있다. 2주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훈련을 해야 한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을 뒤늦게 실감한 그는 "우승을 했으니까 인터뷰를 많이 하면 좋은 거라 생각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평생 잊지 못할 한 해를 보냈다. 특히 화려한 개인 수상이 한선수의 올 시즌을 더 빛냈다. 하지만 그는 "상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승을 한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우승을 하고 상까지 받아서 기분이 배로 좋은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이어 "4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다음 목표로 잡았는데, 다음 시즌에도 우승이 제일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정규 리그 MVP 수상이 가장 뜻깊다. 줄곧 날개 공격수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신영석(한국전력)이 2017-2018시즌 미들 블로커 최초로 MVP를 차지한 바 있지만 세터 수상은 한선수가 처음이다.
후배 세터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귀감이 될 만한 성과다. 이에 한선수는 "MVP는 누구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득점을 만드는 공격수가 중요하게 비춰지긴 하지만 무조건 공격수가 받는 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리베로도 있고 세터도 있기 때문에 두루두루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정규 리그, 챔피언 결정전 MVP를 모두 거머쥐었지만 베스트7 세터 부문 수상에는 실패했다. 베스트7은 투표 60%(전문위원 10%, 언론사 40%, 감독 및 주장 10%)와 기록 40%로 산정되는데 세트 부문 1위(세트당 10.604개)에 오른 황택의(KB손해보험)가 수상했다. 한선수는 올 시즌 세트 부문 3위에 그쳐 이 상을 놓쳤다.
하지만 한선수에게 아쉬움은 없었다. 그는 "전혀 아쉽지 않다. 우승을 한 뒤에도 MVP까지 받을 줄 몰랐다"면서 "MVP 수상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대한항공 한선수가 14일 경기도 용인시 대한항공연수원 배구단체육관에서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 "세터 계보 이을 선수 나오려면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한선수는 명실상부한 최고 세터다. 올 시즌 누적 세트 1만7000개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정규 리그 기준 세트 성공 1만7551개를 기록 중인 그는 이 부문 2위인 팀 동료 유광우(1만3795개)보다 무려 3000개 이상 앞서 있다.
대기록을 써내려 가고 있는 한선수는 "선수 생활을 오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토스 하나하나가 최초라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플레이하려 한다"고 책임감을 드러냈다. 이어 "누적 세트 2만 개를 목표로 삼았는데 42세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고 내심 개인 기록에 대한 욕심도 비쳤다.
그런데 V리그는 한선수 이후 명세터 계보가 끊긴 모습이다. 한선수는 후배 세터들에 기본기를 강조했고, 안 좋은 리시브도 받아낼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 시스템으로는 뛰어난 선수를 발굴하기 어렵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기도 했다.
V리그에서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세터로 눈여겨 본 선수가 있냐는 질문에도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한선수는 "후배들 중 좋은 세터가 많다. 신체 능력과 운동 능력 모두 뛰어나다"면서도 "한국 배구는 그 선수들이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기 어려운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세터는 본인의 생각대로 플레이를 해야 되는데 지도자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면서 "세터가 그런 식으로 플레이를 하면 발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선수 육성에 대한 문제점도 짚었다. 한선수는 "신인들 중에는 기본기가 부족한 선수들이 많다. 해외 리그에서 뛰는 신인들만 봐도 어느 위치에 있어도 기본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제 역할을 해낸다"고 말했다. 이어 "시스템적으로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중고교 학생 운동부 선수들의 경우 정규 수업을 모두 마친 뒤에야 훈련을 받을 수 있다. 2017년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시행된 '최저 학력제'로 인해 오전 수업만 받고 훈련을 했던 과거와 환경이 달라진 것. 이에 중고 배구 현장에서는 선수 육성을 위한 훈련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선수는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건 맞다고 생각한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어 "운동을 많이 한다고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운동하는 시간이 짧아도 선수가 스스로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한국 배구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다. 하지만 선수 은퇴 후 행보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하지 않고 있다. 한선수는 "지도자 혹은 행정가 모두 아직은 관심이 없다. 일단 선수 생활을 하기에도 바쁘고 힘들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고 말을 아꼈다.
대한항공 한선수가 14일 경기도 용인시 대한항공연수원 배구단체육관에서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 "개인적인 목표?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 따고 싶어요."
올해 만 38세로 불혹을 앞두고 있지만 42세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지만 세월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몸 관리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다.
한선수는 "몸이 가장 힘들다. 컨디션이 올라오는 것도 느리고 아픈 곳도 많다"면서 "아프지 않아야 잘할 수 있을 텐데 통증을 이겨내는 게 힘든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어 "아픈 부위에 대한 보강 운동을 많이 하고 있다. 최근에는 무릎 통증을 완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서 "근력 운동량을 늘려봤을 때는 오히려 관절에 무리가 와서 몸 상태에 맞게 조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수 생활의 끝자락을 향하고 있지만 목표는 오히려 더 확고해지고 있다. 4시즌 연속 통합 우승이라는 팀의 목표와 함께 개인적으로는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한선수는 "4연패가 가장 큰 목표다. 이후 개인적으로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목표인데 기회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고 전했다.
최근 국가대표로 뛸 의향이 밝힌 한선수는 태극 마크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대표팀에 가면 항상 얻어오는 게 많았다"면서 "국제 대회 성적이 부진했던 건 아쉽지만 대표팀에서 경험은 선수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남자 배구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예선 탈락 이후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지난해 열린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챌린저컵에서도 우승을 놓쳐 2024 파리올림픽 출전 가능성도 희박해진 상태다.
이처럼 국제 대회에서 부진한 성적에 한선수는 "선수들이 코트에서 투지를 보여줘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시스템적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시즌이 끝나고 모여서 훈련을 하면 국제 대회에서 사용하는 공인구에 적응하다 끝나는 것 같다"면서 "준비 기간이 짧고 운영적인 부분에서 바뀌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국제 대회 부진은 남자 배구의 흥행 실패로 이어졌다. 올 시즌 V리그는 50만 관중을 회복하고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열기가 뜨거웠다. 하지만 남자부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8-2019시즌 대비 관중수가 34% 감소했다. 38.3% 상승한 여자부와 흥행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여자 배구는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배구 여제' 김연경(흥국생명) 등을 앞세워 4강 신화를 쓰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에 한선수는 "국제 대회 성적이 좋아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 대표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한선수가 바라보는 다음 목표는 대한항공의 4시즌 연속 통합 우승이다. 그는 올 시즌 열렬한 응원을 보내준 팬들에 "항상 끝까지 믿고 응원해 주신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한 뒤 "팬들과 함께 4시즌 연속 통합 우승을 이루고 싶다"고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