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노컷뉴스 취재진이 입수한 해당 문건의 한국 관련 내용.70년 동맹 관계 속에서 아무리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10년만에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도청 의혹이 폭로됐다. 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주요 언론은 우크라이나 전황 등을 분석한 미국 정부의 기밀 문건이 소셜미디어에서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문건에는 지난 3월 1일 대통령실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지금까지의 정책을 변경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공식화하는 방안을 거론하자,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어 국내에서(domestically) 회담과 무기 지원을 거래(trade)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우려(expressed his concern)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김 실장은 폴란드에 155mm 포탄 33만발을 수출하고, 폴란드가 이를 다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우회 지원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내용도 문건에 포함됐다. 해당 문건엔 'SI(Special Intelligence)-Gamma', 즉 출처를 은폐해야 하는 '특수정보'라는 표시가 돼 있어, 내용이 사실이라면 도청 또는 내부 협조자를 통해 새어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방위사업관리규정 199조는 수출된 방산물자는 '대한민국 정부의 사전 서면승인 없이는 제3국이나 제3자에게 수출·판매·양도 기타 처분할 수 없으며 수출허가 시 승인된 목적 이외에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지만, 현실적으로 155mm 포탄 한 발 한 발의 이동 상황을 우리가 감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직접적인 지원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이 돼, 우리와 여러 경제 문제가 얽혀 있는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군사기밀보호법 시행령에 따르면 1급 비밀은 '누설될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치명적인 위험을 끼칠 것으로 명백히 인정되는 가치를 지닌 것'이며, 2급은 '누설될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현저한 위험을 끼칠 것으로 명백히 인정되는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같은 시행령을 보면 2급 비밀의 세부 기준에 '집단안보결성 추진계획', '비밀 군사외교활동' 등이 포함돼 있으므로, 미국이 도청한 우리 대통령실 내부 대화는 이와 비슷한 수준의 민감성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미연합군의 전시 작전계획(5027, 5015) 등 '한미연합비밀'은 원래도 공유되지만 정부 내부 논의 내용 등은 당연히 별개 문제다.
그런데 대통령실 관계자는 10일 "양국이 상황 파악을 끝내면 우리는 필요할 경우 미 측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며, 이런 과정은 한미동맹간 형성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이뤄질 것"이라면서도 "한미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을 과장하고 왜곡해서 동맹 관계를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면 많은 국민들로부터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엄포부터 놓았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은 원론적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이 한국 정부를 도청한 사실에 대한 비판마저 '동맹을 흔든다'고 치부한다면 오히려 국내 여론 악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첩보 수집 자체가 동맹국 사이에조차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해도 이것이 드러나는 일은 또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립외교원장을 지냈던 한동대 김준형 교수는 "이 사안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잘못인데 한국이 오히려 미국을 수습하는 모양새가 됐고, 그 부분부터가 잘못됐다"며 "문건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과 정상회담이 '거래'로 보일까봐 우려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불균형한 외교를 하게 되면 국내 여론은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과거에는 우리가 방기(abandonment, 약소국과 강대국의 비대칭 동맹에서 약소국이 버림받는 것)의 두려움 때문에 미국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줬지만, 이제는 아니다"며 "지금(의 윤석열 정부)처럼 미국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식으로 계속 간다면 별 문제는 안 되겠지만, 올바른 한미관계로서의 수습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사실 유럽에서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를 제외하면 미국의 가장 오래된 동맹 중 하나인 독일도 이런 도청을 당했고, 이는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국가안보국(NSA) '프리즘' 프로젝트 폭로로 불거진 바 있다. 당시 NSA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휴대전화까지 도청한 사실이 드러나 양국은 상당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동맹국을 더 이상 도청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21년 5월 덴마크 공영방송은 NSA가 2012~14년 덴마크를 지나는 해저 통신 케이블을 통해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정치인들의 전화통화와 인터넷 정보에 접근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메르켈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동맹국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히 비판했고, 백악관은 안보 채널을 통해 동맹국들과 공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청 문제가 이번에 또다시 터진 것이다.
일단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9일(현지시간) 문건에서 거론된 프랑스 특수부대의 우크라이나 내 활동과 모사드의 국내정치 개입을 전면 부인했다. 겉으로는 이 문건이 러시아 또는 친러 세력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속으로는 이번 사건으로 서방 진영의 집단방어·안보체제에 균열이 가는 것을 우려하는 모양새다. 물론 두 나라가 비공개로 미국에 항의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역 시절 군 내 '미국통'으로 꼽혔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우리가 취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큰 이슈이지만 동맹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조용히 처리하는 쪽이 바람직하다"며 "프랑스와 이스라엘을 보면 '가짜 뉴스'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비공개 항의를 했을 것으로 보이며, 우리도 비공개로 강하게 항의하되 외형적으로 '강한 동맹'의 분위기는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대 전 의원도 10일 아침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국가 주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항의할 것은 하면서도, 한미정상회담은 국가 대 국가 관계로서 국익을 논해야 하는 자리"라며 "이런 게(여러 의제가) 섞여 버리면, 미국은 (쓸 수 있는) 카드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오히려 불리한 위치로 가게 된다"고 신중한 대응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