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로 떠오른 제주시 금악리 테쉬폰. 고상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②개발 광풍에도…제주 일식주택 100년간 서 있는 이유는 ③포구 확장하고 도로 건설…사라지는 제주 어촌 '소통의 빛' ④택지 개발로 사라질 위기 제주 4·3성…주민이 지켜냈다 ⑤'아픈 역사 축적' 제주 알뜨르비행장,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⑥무성영화 시대 제주 마지막 극장 철거…사라진 기억들 ⑦4·3으로 초토화 된 제주 중산간 마을…뿌리 내린 사랑 (계속) |
"지붕만 있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물인데, 견고하게 생겼네요." 지난 5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성이시돌 목장 인근에서 만난 장준석(34‧서울)씨는 이국적인 모습의 테쉬폰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이같이 말했다. '테쉬폰'은 4·3을 거치며 폐허로 변해버린 제주 중산간 마을에 지어진 제주만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고(故) 맥그린치 신부의 도민 사랑이 담겼다.
4·3으로 폐허 된 중산간…도민 '자립' 위한 테쉬폰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한국명 임피제·2018년 4월 23일 선종)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25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1954년 선교사로 제주시 한림 본당에 부임하면서 제주와 연을 맺었다. 한국전쟁과 4·3을 거치며 경제적으로 황폐한 제주에 부임한 그는 도민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1960년대 초부터 중산간 지역인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일대에 목장을 조성했다. 당시 금악리는 일제 말기 강제공출과 콜레라, 4·3으로 황폐화된 상태였다. 목장 이름도 중세 스페인의 농부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정한 시골 공동체 수호성인인 '성이시돌'에서 따왔다.
테쉬폰 공사 모습. 농업회사법인 이시돌 제공목축에 필요한 주거시설과 창고시설, 돈사 등을 단기간에 지을 필요성이 있었다. 이때 도입된 것이 테쉬폰 구법이다. 아일랜드 구조 기술가 제임스 윌러가 메소포타미아 크테시폰 유적의 아치 구조물에서 영감을 얻어 고안한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 실정에 맞는 이 구법을 선택했다.
테쉬폰은 시멘트나 철근 등의 건축자재가 상당히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간단한 자재와 건축술로도 빠른 시간 안에 지을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었다. 가마니를 거푸집으로 사용함으로써 철근을 쓰지 않고도 콘크리트를 타설해 기본 구조를 만들었다. 개방된 부분은 시멘트블록으로 마감했다.
모양도 특이하다. 물결 모양의 아치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쉘 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테쉬폰의 장점은 내부에 기둥이 없기 때문에 넓은 평면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이시돌 목장 외에도 선흘리, 월평리, 아라동, 오라동 등지에 테쉬폰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이용규 교수는 "한국전쟁과 4·3 이후 관 주도로 '구휼' 차원의 복귀 주택과 후생주택이 공급됐다. 테쉬폰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자'는 차원이 아니라 척박한 중산간 지역에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도민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건축물"이라고 설명했다.
故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중산간에 뿌리내린 테쉬폰…공동체 회복의 상징
제주 중산간 지역에 뿌리내린 테쉬폰은 공동체 회복의 상징이다. 70여 년 전 4·3 당시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지역 대부분의 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다. 맥그린치 신부는 금악리뿐만 아니라 오라동, 선흘리 등 7개 지역에 개척농가 사업을 추진하며 '테쉬폰 마을'을 세웠다.
제주시 금악리 개척농가 테쉬폰에서 두 아들을 키워낸 고숙정(76‧여)씨는 당시 생활을 이렇게 기억했다. 고씨는 1973년 개척농가에 입주해 1988년까지 거주한 뒤 지금은 제주시에 산다.
"금악리 개척농가에는 테쉬폰이 24개동 있었어요. 저희 집은 24번째로 지어진 집인데, 테쉬폰에다 가건물을 이었어요. 명절이나 제사 때 마을 사람들 모두 저희 집에 모여서 음식을 함께 해먹었어요. 이웃집은 테쉬폰에서 5남매를 키웠어요. 열악했지만, 서로 도우면서 사이좋게 지냈죠."
제주시 평화로 인근에 남아 있는 테쉬폰. 고상현 기자4·3 당시 중산간인 제주시 빌렛못 마을이 불타버려 삶터를 잃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는 고상국(77)씨는 "이시돌 목장에서 양도 돌보고, 집도 지으면서 돈을 벌었지. 나중에는 소 한 마리를 사서 키웠는데, 그게 번창해서 밭도 사고 자식들도 길러내고 지금은 풍족하게 살지"라고 기억했다.
테쉬폰은 단순히 탁 트인 전망의 목장과 함께 이국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건축물이 아닌, 제주도민에게는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삶 속 자립의 기회이자 파괴됐던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한다.
개발 광풍 속 사라지는 테쉬폰…"보전 계승해야"
한때 제주 중산간에 200채 가까이 공급됐던 테쉬폰은 현재 23채만 남아 있다. 개발 광풍 속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제주시 월평동 첨단과학단지에 남아 있는 테쉬폰도 철거 위기에 처했다.
남아 있는 테쉬폰도 방치된 상태다. 취재진이 제주시 금악리 일대에 남아 있는 테쉬폰을 살펴본 결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2곳 외에는 훼손이 가속화하고 있다. 수풀로 덮여 있거나 건물 외벽이 떨어져 나간 상태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마저 안내 푯말도 없어 어떤 건물인지 모른다.
방치된 테쉬폰 모습. 고상현 기자특히 테쉬폰 구법에 대한 주거사적, 기술사적 가치에 대한 연구와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그 보전과 계승에 대한 구체적인 성과는 아직까지 충분히 이뤄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다.
제주대학교 이용규 교수는 "테쉬폰이 대부분 사유지에 있다 보니 행정에서 매입하는 데 제약이 있는 게 사실이다. 곶자왈 보전을 위한 곶자왈공유화재단 활동처럼, 테쉬폰을 지키려는 사람들 중심으로 기금 형태로 모금해 테쉬폰이 있는 사유지를 매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테쉬폰은 목재 등 자원이 없었던 중산간 지역에서 용이하게 지을 수 있었던 건축 기술이다. 그 방법론과 계승에 대한 연구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아울러 테쉬폰에서 살았던 사람이나 그것을 만들었던 사람에 대한 아카이빙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故 맥그린치 신부 동상. 고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