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전경. 한수원 제공▶ 글 싣는 순서 |
①[르포]영구정지·수명연장 엇갈린 운명…고리원전을 가다 ②원전 탄생부터 핵연료 보관까지…지역민 목소리는 '실종' (계속) |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최근 고리원전 2~4호기 계속운전(수명연장)과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 설치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역민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원전을 둘러싼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견수렴을 형식적으로 하는 오래된 기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평가서 열람 누가 하나?" 현실과 거리 먼 의견수렴
고리원전 반경 30km 안에 들어가는 부산 부산진구 일대 거리에는 최근 생소한 내용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현수막에는 '고리3·4호기 계속운전 관련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초안) 주민공람 사전 안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현수막 옆을 지나던 부산시민들은 대부분 이 문구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했다. 고리 3·4호기 계속운전(수명연장)을 위한 의견수렴 절차로, 한수원이 작성한 수백페이지 짜리 평가서를 관공서에 직접 찾아가 읽고 의견을 제시하라는 내용이라고 설명하자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부산 부산진구 한 주민센터 앞에 고리3·4호기 계속운전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 공람 사전안내 현수막이 붙은 모습. 김혜민 기자시민 손명진(20대·남)씨는 "평가서가 300페이지라면 열람 못 할 것 같다. 그 정도로 의견 낼 사람은 많지 않다"며 "사고 가능성이 0%라면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고리원전에 인접해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공람 방식은 정말 별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용일(60대·남)씨는 "누가 바쁜데 그거(평가서 열람) 하러 관공서를 찾아가겠나. 개개인이 찾아가서 의견 제시하라고 하면 안 할 것 같다"며 "차라리 집마다 설문지를 나눠주면 몰라도,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원전 계속운전을 위한 한수원의 '의견수렴'은 원자력안전법 103조를 근거로 한다.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할 때 초안을 공람하게 한 뒤, 공청회를 통해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평가서 내용에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원전 인근 주민의 의견수렴을 강화하기 위해 2015년 추가됐다.
이 조항이 처음 적용된 건 지난해 한수원이 고리2호기 계속운전을 추진할 때였다. 반경 30km 이내 부산·울산·경남 16개 지자체에서 평가서 초안 열람을 진행하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300쪽 넘는 평가서를 관공서 운영 시간에 찾아가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인 데다 내용 또한 전문 용어로 가득했던 탓이다.
그 결과 부산지역 10개 구·군 주민 240여만명 가운데 평가서 초안을 열람한 사람은 '158명'에 그쳤다. 이 상태에서 한수원은 다음 단계인 공청회를 진행했다. 제대로 된 의견수렴이 아니라며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가 반발해 열릴 때마다 파행을 거듭했으나, 한수원은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며 공청회를 마무리 지었다.
지난해 12월 부산 남구에서 열린 고리2호기 계속 운전 관련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 공청회장에서 환경단체 회원(현수막 주변)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한수원 관계자(단상 맨 위)가 공청회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박진홍 기자원전 이슈에서 지역 의견이 실종됐다는 지적은 '계속운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7일 한수원 이사회가 고리원전 부지에 사용후핵연료 보관용 건식저장시설을 짓는 계획안을 의결하자, 기장군과 기장군의회는 "주민 동의를 구하는 절차나 의견수렴 없는 독단적 추진"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기장군은 "한수원이 건식저장시설을 원자력안전법상 주민 동의절차 없이 추진할 수 있는 '관계시설'로 간주해 밀어붙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부산지역에선 130개 넘는 시민단체가 모여 범시민운동본부를 꾸리고 일방적인 건식저장시설 설치와 고리원전 수명연장(계속운전)을 규탄했다. 민·관이 한목소리로 '지역민 패싱'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수십년 반대해도 소용없어…"형식보다 내용 채워야"
우리나라 원전의 역사를 지척에서 함께한 기장군 주민들은 원전과 관련한 주요 의사결정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된 경험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기장에서 수십 년간 거주한 황운철 기장군의원은 "70년대 초 국가 정책으로 고리원전 건설이 시작될 때부터 주민들은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황 의원은 "당시는 혐오시설이나 방사능 위험에 대한 개념은 부족했고, '원자 폭탄으로 발전한다'는 이유로 주민 반감이 컸다. 반대 시위도 진행했으나,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전과자도 많이 생기고 강제로 진행됐다"며 "고리1호기 수명연장 때도 주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거세게 반대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 보니 주민들은 '어차피 원전은 지어져 있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이제는 한수원에서 나오는 각종 주민 지원사업 등 현실적 지원이라도 받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다. 상황이 이러니 한수원도 주민 의견수렴은 안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고 부연했다.
21일 부산지역 139개 시민단체가 모인 '부산 고리2호기 수명연장·핵폐기장 반대 범시민운동본부'가 부산시청 광장에서 출범식을 열고 있다. 김혜민 기자
정책 전문가들은 원전 관련 의사결정 과정이 여전히 형식적인 의견수렴에 머물러있다고 지적하면서, 투명한 정보 공개와 꾸준한 합의 과정을 전제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경근 한국정치학회 이사는 "핀란드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장인 '온칼로'는 1983년부터 논의를 시작해 40년 동안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민과 철저하게 협의해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반면 고리2호기 계속운전 과정에서 진행한 공청회는 일방적인 주장을 전달하는 자리였을 뿐, 시간과 공을 들여 협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전혀 아니었다"고 꼬집었다.
이어 "원전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매우 적다고 하지만, 천재지변을 포함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고리원전 반경 30km 안에 부산시청도 들어간다"며 "절차만 밟으면 될 일이 아니라,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주민 동의나 당사자 합의를 얻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고리3·4호기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 열람을 앞둔 한수원은 2호기 열람 당시 나온 지적을 일부 수용해 개선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수원 고리본부 관계자는 "초안이 이해가 어렵다는 지적이 많아 불필요한 내용은 최대한 줄이고, 주요 내용 요약본을 따로 만드는 한편 별도 설명자료와 동영상 자료도 준비 중"이라며 "최대한 많은 주민이 열람할 수 있도록 홍보를 강화하고, 초안 문서 인쇄도 가능하도록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