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지옥 임실 폐광굴 '오소리 작전'…"민간인 600명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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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74년 전인 1948년 10월 19일은 전남 여수 제14연대가 제주도민을 무력 진압하라는 정부 명령에 항명하며 여순사건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전남 여수 ‧ 순천 일대에서 벌어진 9일간의 악몽은 그 이후에도 전남 광양과 구례, 전북, 경남 등 지리산 일대에서 민간인에 대한 군경의 무자비한 학살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당대의 희생은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고, 유가족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만이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습니다.
이에 전남‧전북CBS는 지리산 권역에서 경계를 가로지르며 발생한 민간인들의 희생과 그로 인한 한(恨), 그리고 진상 규명을 위해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길을 조명하는 공동특별기획 6부작 <여순의 또 다른 진실, 지리산 킬링필드>를 마련했습니다.

[전남‧전북CBS 공동특별기획 6부작]
여순의 또 다른 진실, 지리산 킬링필드

▶ 글 싣는 순서
① 여순, 또 다른 비극의 서막…대를 거친 악몽 어디까지 이어졌나
② "지리산에 산다고 끌고 가 맥없이 죽였어"…끝나지 않은 여순
③ 생지옥 임실 폐광굴 '오소리 작전'…"민간인 600명 몰살"
(계속)

"연기 피워 민간인 600여 명 질식"…임실 폐금광 사건


"아버지는 군경이 땐 연기에 죽고 친형은 군경이 때려죽였어요. 어머니가 '복이 없는 놈이 느그 아버지가 죽었는데 뭔 학교에 다닐 복이 있냐'며 '학교에 다니지 마라' 그래서 학교도 못 갔죠. 일만 했어요."
 
낙농업이 발달해 치즈로 유명한 임실. 이곳에 그야말로 생지옥에 다름 아닌 비극의 역사를 가진 금광이 있다.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와 강진면 백련리에 걸쳐있는 부흥광산.
 
일제는 이곳에서 1933년 4월부터 1943년 말까지 11년 동안 금·은을 캤다. 갱도만 총 864m인 부흥광산의 매장량은 1만 8천t(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의 강제 노역의 아픔이 남아있는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참극이 자행됐다.

일명 '오소리 작전'. 군경은 1951년 3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밤낮으로 광산 입구에서 연기를 피워댔다.

임실 폐금광. 정민환 감독임실 폐금광. 정민환 감독
군경이 피운 연기에 죽은 민간인만 수백 명, 군경은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이들을 빨치산으로 몰아 죽였다.

"군경이 3일 동안 (금광 입구에서) 불을 때버렸다 이거예요. 3일 동안 불 때니까 굴속에 있는 사람은 다 죽어버리죠. 그 뒤에 동네 양반들이 들어가서 아버지 돌아가셨는가 하고 시체를 찾으려고 들어가니 아버지는 쓰러져서 죽어있어요"

당시 10살 최원주(82)씨는 임실 폐금광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살아생전 빨치산과는 무관한 아버지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유 없는 죽임을 당했다.

"주민들은 한 400명 정도 이렇게 죽지 않았나 싶어요. 동네 양반들이 말을 하더라고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빨치산은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더라'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금광에서 도망 나온 그의 친형은 군경에 잡혀 경찰지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 숨졌다.

최원주(82)씨. 그는 임실 폐광굴 분화 사건 당시 아버지와 친형 모두를 잃었다. 정민환 감독최원주(82)씨. 그는 임실 폐광굴 분화 사건 당시 아버지와 친형 모두를 잃었다. 정민환 감독
"형은 그쪽(폐금광)에서 안 죽었나 봐요. 군경이 들어가서 수색하니까 살아있어서 잡아 나왔단 말이에요. 그래서 청웅지서(파출소)에 가서 질문하고 물어보고 하다가 이제 말을 제대로 안 한다고 패 죽여 버렸다니까요."
 
그날 아버지와 형을 잃은 최원주씨는 줄곧 '복 없는 팔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형님 죽을 때 제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학교를 나오라고 해서 학교를 갔어요. 근데 어머니가 '복이 없는 놈이 느그 아버지가 죽었는데 뭔 학교를 다닐 복이 있냐'며 '학교를 다니지 마라' 그래서 학교도 못 갔죠. 그래도 학교를 가려고 하면은 어머니가 '벌어먹고 이제 먹고살아야 하니까 너는 일해'라며 조그마한 것을 학교도 못 가게하고…학교 못 가고 어머니 따라 농사만 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었죠."

8살 어린 나이에 어버지를 잃은 이영희(78)씨. 정민환 감독8살 어린 나이에 어버지를 잃은 이영희(78)씨. 정민환 감독

아버지를 잃었던 이영희(78)씨도 어린 나이에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짊어져야 했다. 그는 당시 부락민 대부분이 폐금광에 숨었다고 말한다.
 
"(군경이) 민간인 토벌한다고 싹 따라 들어간 것이 전체 부락민들이 그랬잖아. 거기 들어간 사람을 전부 좌익으로 생각한 거지. 살림이야 말할 것도 없지. 나도 13살 먹어서 지게를 맡았어. 그 상황은 이야기할 수가 없어 상상을 못해."
 
마을주민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어버린 상황. 죽은 사람에 이어 산 사람들도 마을을 모두 떠났다. 이씨는 텅 비었던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마을 분위기는 말도 못 해. 다 돌아가시고 지금 여기 사는 분은 나뿐이 없어. 여기 사는 분 다 나가버렸어요. 마을 젊은 청년들이 돌아가셨으니까."

폐금광 안으로 들어오는 연기를 피해 굴 밖으로 나온 이들은 40여 명. 군경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강진면의 한 골짜기(속칭 멧골)로 끌고 가 총살했다.
 
한국전쟁유족회 임실유족회 서창록 회장은 "나오면 죽는 것 뻔히 안는데 누가 나오냐 말이요"라며 "일부는 나왔어요. 한 40명이 나왔는데 나온 사람들은 다 (임실) 강진으로 싣고 가서 다 죽여 버렸어요"라고 했다.

전북 임실군 성수면의 왕방리 인근. 지금은 저수지가 된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정민환 감독전북 임실군 성수면의 왕방리 인근. 지금은 저수지가 된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정민환 감독

친형 죽고 아버지는 골병…평생 농사만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청리 구곡마을에서 80여 년을 살아온 송이섭(84)씨는 12살 때부터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빨치산도 아닌 형님이 군인 총에 맞아 죽었어요. 아버지는 반동으로 몰려서 매를 맞고 골병이 들었고요. 아무것도 못 하시니 열두 살 먹어서 지게를 짊어졌어요. (내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동생을 나무해서 먹여 살렸어요."

송씨는 1950년 12월 7일, 음력 10월 28일 형을 잃었다. 송씨의 형님은 전쟁통에 학업을 중단하고 나무를 뗐다. 형님이 나무하러 막 집을 나서던 그때 송씨는 총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집 안에서 숨어있다 나가니 총을 맞은 형님을 보게 됐다.
 
"총소리가 나는데, 한참 있으니 사람이 죽었네요? 그래서 보니까 하필 우리 형님이 맞았어요. 빨치산 행동도 안 했는데요."

군경에 의해 친형을 잃었던 송이섭(84)씨.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청리 구곡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정민환 감독군경에 의해 친형을 잃었던 송이섭(84)씨.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청리 구곡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정민환 감독
친형을 잃은 송씨는 연필을 쥐고 있을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송씨의 아버지는 반동분자로 몰려 매를 맞아 골병이 들었다.

"우리 아버님은 또 반동으로 몰려서 매를 맞았어요. (아버지가) 골병이 들었어요. 아무것도 못 하셔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을 내가 먹여 살렸어요. 12살 먹어서 지게를 짊어졌어요. 그때부터 내가 농사짓고 나무하고 이렇게 해서 생활했어요. 오늘날까지 농사짓고 그래요."

송씨에 따르면 마을 부모들은 군경에 사살당한 아들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때 우리 부락에서 참살당했거든요. 음력 2월인가 시신 수습하라고 통보가 왔어요. 이제 부모들이 갔죠. 시신 옷을 보고 자기 아들들 확인해 가지고 고향에다 묘를 썼죠."
 
군경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빨갱이 딱지가 붙은 채 살아가야 했다. 고통만 있는 마을을 떠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우리 형님이 전주로 가려고 해도 빨갱이로 몰려 못 나가니까 그만큼 고생을 했어요. 그만큼 고통받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유재경(81)씨는 작은아버지가 자신에게 대신 한글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정민환 감독한국전쟁이 터지고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유재경(81)씨는 작은아버지가 자신에게 대신 한글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정민환 감독
한국전쟁이 터지고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유재경(81)씨는 자신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던 작은아버지를 군경의 학살에 떠나보내야 했다.

1951년 4월 25일, 음력 3월 20일 마을을 찾은 군경은 작은아버지를 묶어 어디론가 데려갔다. 임실 성수면의 왕방리 인근, 지금은 저수지가 된 그곳에서 군인의 총에 사살됐다.
 
"한국전쟁 터지고 2학년 다니다 말았어요. 학교를 안 다녔어. 우리 작은아버지가 저녁에 가르쳤습니다. 기역, 니은, 아, 야 가르쳤는데 그런 사건이 났죠. (군경은) 우리 개가 짖으니까 개도 쏴버렸어요."

성수면 주민 100여 명이 끌려가 죽은 성수면 왕방리 문바위 지역. 주민들은 그곳을 무서운 곳이었다고 말한다.
 
송씨는 "저기(문바위)에서 다 사살시켰어요. 그때 당시는 여기가 상당히 서먹서먹하고 무서운 곳이었어요"라며 "세월이 가다 보니 그것도 점차 잊히고 있는 형편이죠"라고 설명했다.

서창록 한국전쟁유족회 임실유족회 회장. 정민환 감독서창록 한국전쟁유족회 임실유족회 회장. 정민환 감독

정권 바뀔 때마다 멈춰서는 진상 규명


한국전쟁유족회 임실유족회 서창록 회장은 진상 규명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오면서 중지를 시켜버린 거예요. '이건 안 된다' 조사를 전부 차단해 버렸어요."
 
한국전쟁유족회 임실유족회 최정근 사무국장은 "폐금광과 멧골에 있는 유골을 발굴해야 한다"며 "금광 밑에 200여 구 이상과 멧골 40여 구의 발굴을 위해 (유족회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아직도 가족의 시신을 못 찾은 유족들이 있다"며 "국가는 DNA검사를 해서라도 가족을 찾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최 사무국장은 진실화해위원회의 1차 조사가 축소 보고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진화위 1기가 폐금광은 전체적으로 596명인데 이것을 370여 명으로 축소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영상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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