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핀 무렵, 아버지를 묻었다
"진달래꽃이 활짝 펴 있더라고 그걸 따서 먹고 이제 고개를 넘어가니까 바로 그 너머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어. 그게 뭔 작업인가 했더니, 아버지랑 돌아가신 양반들을 그때야 갖다가 묻은 거야."
1949년 봄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당시 6세였던 이신우(80)씨는 그의 손으로 직접 부친의 유골을 수습해야 했다.
누가, 왜 아버지를 죽였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훗날 이씨는 어머니와 마을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됐다.
한국전쟁 이전인 1948년 11월 19일, 음력 10월 19일 새벽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고촌마을에 군경이 들이닥쳤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 중이던 호남 전투사령부는 느닷없이 고촌마을 주민 40여 명을 운봉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이신우씨의 부친 또한 그곳에 있었다.
그는 "빨치산이 돌아다니는 건 없었고 '좌익이네 우익이네' 이렇게 통했던 것 같더라"며 "(군경이 마을 주민을) 운봉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패를 나눴다"고 말했다.
"'산골짝으로 가서 그냥 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며 "죄도 없이 '동네에 살았다'는 그거 하나로 끌려가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빨치산과는 분명 거리가 먼 아버지였다
군경의 시뻘건 눈이 무서워 그 즉시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 감시가 소홀해지고 나서야 이듬해 묘를 썼다.
한국전쟁 이전인 1948년 11월 19일 새벽 전북 남원시 고기리 고촌마을에 살았던 이신우(80) 어르신. 당시 6살의 나이에 군경의 총에 아버지를 잃었다. 정민환 감독비극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을 주민을 학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경은 집집마다 불을 붙였다. 그렇게 아버지와 집도 모두 잃은 이신우씨는 마을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아유, 생활이란 건 말할 수가 없지.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했고, 또 동네회관에 가서 방을 얻어서 사는데 냄비랑 솥이 귀했거든. 그래서 철솥? 그런 솥을 갖다 걸어놓고 나물을 하다 불을 때서 밥을 해 먹고 있었는데, 하룻저녁 자고 나오니까 (빨치산이) 솥단지도 뺏어갔어"
이는 무자비했던 군경은 물론, 빨치산으로부터도 피해를 입어야했던 당시 무고한 민간인들이 겪어야했던 삶의 현주소였다.
같은 날 아버지를 잃은 건 이맹우(78)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을 주민들이 얼굴에 총을 맞아버린 탓에 시신들의 옷차림으로 신원을 구별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생존자의 말을 빌려 "전부 창호지로 눈을 가리고 쭉 (피해자를) 엮어놓고 뒤에서 그대로 갈겨버렸다"며 "얼굴을 관통했다"고 했다.
이어 "허리띠나 대님, 단추를 보고 시신을 찾아왔다"며 "당숙이 아버지 시신을 구루마(달구지)에 싣고 왔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골짜기는 그야말로 생과 사가 나뉘는 지옥의 현장이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집단 살해가 일어난 현장을 똑똑히 지목하고 있다.
이어 "43명이 운봉리 용산이라는 골짜기 가서 그대로 군경에 의해 죽었다"며 "(종이에) 희생자들을 써놨는데 소각해버렸다"고 했다.
그가 가리킨 학살 현장은 한때 축사 단지가 들어섰다가 사라져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지문처럼 남아있는 듯했다.
이맹우(78) 어르신. 축사 단지가 들어섰다 사라져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는 학살 현장을 찾은 이맹우 어르신. 정민환 감독"집 다 태워 거지가 돼 구걸하고 다녔다"…열여섯 명 살해 덕치마을
남원의 참상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이후에도 반복됐다. 고촌마을에서 불과 1.8㎞ 떨어진 노치마을. 마주 보고 있는 두 마을에서 비극이 되풀이됐다.
1950년 11월 20일. 음력 10월 11일 새벽 5시 빨치산 토벌 작전을 명령 받은 육군 11사단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노치마을에 들이닥쳤다.
이윽고 노치마을 옆에 있는 회덕마을의 주민도 노치마을로 끌고 와 두 마을 주민들을 마늘밭에 무릎 꿇렸다.
그리고 집마다 불을 질렀다. 어떤 이에겐 자신의 집에 직접 불을 붙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군경이 흔적도 없이 모든 걸 지워버리려는 청야(淸野)전술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빨치산 토벌 작전을 명령 받은 육군 11사단이 1950년 11월 20일 새벽 5시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노치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때의 참상을 기억하는 유족들이 모였다. 정민환 감독당시 9살이었던 유복수(81)씨는 "싹 불태워 버리고 없었어요. 입만 있지 아무 옷도 없었죠"라며 "쌀이 있어, 돈이 있어, 옷이 있어. 전부 거지가 된 거죠"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유씨는 "밭떼기로 가서, 말하자면 살해를 시켰어요. 빨갱이로 몰린 사람도 없었는데 군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여기는 산 밑이고 빨치산 지대이기 때문에 전부 물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여자가 둘 남자가 열넷, 열여섯 명이 죽었어요. 한 집에 둘씩 죽은 사람이 두 집이 있어요"라 했다.
같은 날 두 형님을 잃은 정재윤(82)씨는 형님들이 사살된 장소 앞에 섰다.
"마늘밭이 있었는데 총으로 쏴 죽여서 짚으로 덮어놨더라고. 우리 형님들 둘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양반을 총으로 쏴 죽여서 짚으로 전부 덮어놨더라고.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사는 양반들을 자고 있는데, 데려다가 맥없이 그냥 죽여 버렸어"
한국전쟁 발발 뒤인 1950년 11월 20일 새벽. 두 형님을 잃은 정재윤(82) 어르신이 형님들이 사살된 장소 앞에 섰다. 정민환 감독한순간에 가족과 집, 모든 것을 잃은 마을 주민들은 고초를 겪었다.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삶이 거지와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유복수씨는 "거지가 얻어먹고 다녔던 거죠. 구걸하는 거요. 일 년을 그런 세상에서 살았어요"라며 "죽은 사람도 죽었거니와 사는 사람도 얼마나 고생이 많은 줄 몰라요"라고 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회덕마을의 박종권(89)씨는 소지하고 있던 학생증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박씨는 "그때 당시 나는 남원에서 중학교에 다녔어요. 6·25가 터져서 방학해서 집에 와 있었죠"라며 "학생증을 갖고 있었는데 군인이 학생이냐고 묻자 보여주니 학생증만 뺏어가고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총살 현장은 못 보고 시신들은 다 봤고 마을에서 사람들 전부 모아서 노치로 끌고 온 것"이라며 "그때 무슨 빨치산이 있었겠어요. 빨치산은 산속에 들어있었고 빨치산은 하나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진실 밝히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기다려라"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가족과 이웃이 세상을 등졌지만 눈비를 맞으면서도 견뎌낸 세월이었다.
유원월(82)씨는 "최부잣집에서 방을 얻었어요. 주방도 없고 솥단지 하나 걸어놓고 살았어요"라며 "1년 동안 눈비가 오면 맞으면서 밥을 해 먹었어요. 옷도 없고 계속 입은 것만 입고 그렇게 살았죠"라고 했다.
가족과 집을 잃고 마을을 떠났던 주민들은 마을로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상처만이 남은 그곳에 들어가야 했다.
유씨는 "'다시 마을로 가서 살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귀신들 때문에 못 살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통나무 베어다 사각자 집 지어서 살았죠"라며 "옷도 먹을 것도 없어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맨날 할머니 따라다니면서 울고 그랬어요. 그때 당시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라고 했다.
유원월(82) 어르신이들은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한 진실 규명과 최소한의 배상을 원하고 있다.
유복수씨 또한 "첫째는 국가에서 죽은 사람들 빨갱이 누명을 벗겨줘야죠. 두 번째는 유족들한테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라며 "유족뿐 아니라 당시 거지 아닌 거지 생활을 했던 사람들한테도 보상을 해줘야죠"라고 했다.
노치와 회덕마을 주민 30명~32명이 희생당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보고서 32명, 1994년 전북도의회 조사 보고서 30명) 또 진화위는 국군 제11사단과 경찰로 인한 희생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배·보상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남원시 주천면 고촌마을은 조사는커녕 희생자들의 공식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고촌마을의 경우 유족들이 추정한 희생자는 25명~40명 남짓. 이신우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1990년 후반부터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직접 조사했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비극을 알리고자 국회의원실의 문턱을 드나들며 진상 규명에 나서려고 했지만 번번이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그마저도 매번 선출직 의원들이 바뀌는 바람에 책임 있는 답변 한 번 얻지 못했다.
이씨는 "국회의원이 네 차례나 바뀔 때까지 아무 소식을 듣지 못했다"며 "이번 진화위 2기 조사에서 바라는 것은 진실뿐"이라고 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불쌍하게 돌아가신 양반들 하다못해 비라도 세워주길 바랄 뿐"이라며 통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여순사건이 할퀴고 남긴 깊은 상처는 74년이 지난 지금도 유족들에겐 치유와는 거리가 먼 현재 진행형으로 자리해 있다.
※이 영상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