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제2의 김연경은 왜 나오지 않을까" 김연경 본인에게 직접 물었다 ②'女에 밀리고, 강호에 치이고' 韓 남자 배구, 르네상스는 언제? ③"韓 배구 젖줄? 속이 탑니다" 중고 배구의 절규, 열악한 현실 ④'韓 배구 영광 재현하려면' 프로 구단·협회의 문제 인식과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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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구 최고의 순간, 다시 올까' 김연경을 비롯한 여자 배구 대표팀이 지난해 도쿄올림픽 8강전에서 터키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뒤 기뻐하는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프로배구 여자부 페퍼저축은행 김형실 감독은 최근 2022-2023시즌 신인 드래프트를 앞두고 "선수들을 뽑아도 곧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고교 졸업생들의 실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자 대표팀 지도자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 감독은 프로 남녀부 사령탑을 통틀어 프로 최고령(71살)이다. 그런 김 감독이 보기에도 최근 학생 선수들의 기량은 수준 미달이라는 것이다. 김 감독은 "그래도 학교 배구의 미래를 위해 각 구단 감독들과 최소 2명 이상은 지명하자고 얘기를 나눴다"고 귀띔했다.
한국도로공사 김종민 감독 역시 마찬가지 의견이다. 남자부 대한항공을 거쳐 여자부에서 챔피언 결정전 우승 등 7년째 사령탑을 맡고 있는 김 감독은 "사실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 이후 고교 졸업 뒤 곧바로 주전으로 뛰는 신인이 없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수년째 신인을 받아봐도 신체 조건은 좋지만 실력이 많이 떨어져 프로 선수로 만들기에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덧붙였다.
앞선 CBS노컷뉴스 배구팀의 연속 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기본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학교 선수들이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 운동을 하다 보니 훈련 시간이 적다"면서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는 게 아니라 학교 입장에서는 성적 위주이다 보니 경기에 필요한 부분만 급하게 익히게 한다"고 짚었다. 이어 "이런 점 때문에 프로에 와서도 버티지 못하고 운동을 그만두게 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2022-2023 프로배구 여자부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페퍼저축은행의 지명을 받은 어르헝. 연합뉴스남자부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당장의 성적이 중요한 프로임에도 기본기부터 다지겠다는 구단까지 나왔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은 지난달 컵대회 당시 "민감한 얘기지만 초중고, 유소년 배구까지 봤는데 아마추어 지도자들의 애로사항이 많다"면서도 "어린 선수들에게 기본기 훈련을 시키면 힘들다고 떠나니 재미를 느끼는 공격을 시켜서 기본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최 감독은 유소년 배구 현장을 많이 찾는 지도자로 꼽힌다. 그만큼 한국 배구 젖줄의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최 감독은 5년째 사재를 출연해 벌써 7000만 원 가까운 장학금을 연고지인 천안은 물론 전국 유소년 배구에 지원하고 있다. 최 감독은 "내가 배구에서 받은 게 많은 만큼 돌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한국 배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 최 감독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최 감독은 "한국 배구의 전반적 흐름을 보면 훈련이 거꾸로 간다"면서 "기본기 훈련을 프로에 와서 한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남자부는 대부분 대졸 신인을 뽑는 만큼 대학 배구가 중요하다. 그러나 초중고처럼 대학 배구 역시 수준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화재 김상우 감독은 "대학 선수들도 일반 학생처럼 수업을 모두 들어야 하고 과제도 많다"면서 "배구부 전체가 훈련할 시간이 없는 데다 매일 야간 훈련을 하기도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김 감독은 삼성화재 부임 전까지 성균관대 지휘봉을 잡아 대학 배구에 사정이 밝다.
초중고 학생보다 수업 부담이 더하면 더하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선수가 수업을 듣는 교수도 편의를 봐주다가 잘리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점수를 준다"면서 "대학부는 C학점이 안 되면 경기에 뛰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선수들은 프로로 성공하고 싶어 운동하려고 진학했는데 수업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학교 배구팀이나 선수 숫자가 크게 줄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CBS노컷뉴스가 대한민국배구협회에 요청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초중고 및 대학 배구팀은 최근 10년 동안 소폭 줄거나 현상 유지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등록 선수는 오히려 늘었다.(표 참조)
프로 구단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모 구단 관계자는 "매년 신인 드래프트를 보면 지원하는 선수들의 숫자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선수들의 기량이다. 숫자는 많지만 뽑을 신인이 부족한 현실이다. 감독들은 "신인들은 3년 정도는 훈련을 시킨 뒤 실전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 여자부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페퍼저축은행에 뽑힌 역대 최장신(194.5cm) 신인 체웬랍당 어르헝(18)도 프로에서 고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여자부 구단 관계자는 "페퍼저축은행이 신생팀이라 워낙 장신 선수가 부족해 출전 기회는 잡겠지만 센터진이 강한 팀이라면 어르헝도 벤치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재능이 있는 인재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운동 능력이 탁월한 유망주들의 숫자는 한정돼 있는 상황. 야구, 축구, 농구, 골프 등 경쟁 관계에 있는 인기 스포츠로 유출을 얼마나 막아내고 배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세계 최저 출생률로 인구 감소가 불을 보듯 뻔한 형국이다. 가뜩이나 얇은 저변이 더 얇아질 수 있다. 외동 자녀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힘든 운동을 선택하게 할 부모도 적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유소년 배구에 외국인 학생 선수가 늘고, 프로에서도 아시아 쿼터를 논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근찬 CBS미디어캐스트 대표이사와 김홍 중고배구연맹 회장, 프로배구 선수들을 비롯한 참가 선수들이 21일 충북 단양국민센터에서 열린 '제33회 CBS배 전국중고배구대회' 시상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단양=박종민 기자
대한민국배구협회도 이런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협회 오한남 회장은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심각한 저출산 문제로 인구의 노령화 및 인구 감소가 급격하게 진행돼 유소년 저변이 축소될 수 있다"면서 "협회는 16세 이하 선수의 경우 전문 체육 등록이 아닌 참가 신청만으로 대회에 출전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럴 경우 약 200개 팀, 3000명 이상으로 기존보다 2배 정도 활동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 체육이 아닌 생활 체육으로 영역을 넓혀 인재를 찾자는 것이다. 오 회장은 "이런 선수들 중 장래성이 있는 우수한 인재가 고교 진학 후 전문 체육 선수로 등록을 진행한다면 엘리트 배구도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9인제로 운영 중인 생활 체육 배구를 전문 체육처럼 6인제로 바꿔 상호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방안도 내놨다. 김상우 감독도 "학교 배구팀이 한계가 있다면 클럽에서 인재를 찾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오 회장은 앞서 CBS노컷뉴스의 연속 기사에서 지적한 대표팀의 국제 경쟁력 제고 방안도 밝혔다. 국제 대회 성적이 나지 않으면 배구 인기도 떨어질 수 있는 만큼 협회도 고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단 오 회장은 "당장 여자팀은 2024년 파리올림픽 본선행 티켓 확보가 급선무"라면서도 "남자팀과 함께 2028년 LA올림픽을 대비해 장기적 관점에서 세대 교체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을 쌓을 국제 대회 출전이 중요하다는 의견이다. 이를 위해 오 회장은 "2023 발리볼네이션스리그 여자 대회의 국내 유치를 확정했고, 2025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의 개최도 추진 중"이라면서 "지난 7월말 서울에서 열린 발리볼챌린저컵 등 남자 국제 대회의 국내 개최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 대회의 국내 개최를 통한 안정적인 대회 경험 확보를 꾀하겠다는 것이다.
2022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챌린저컵 한국과 체코의 경기 모습. 연합뉴스
국가대표 장기 육성 프로젝트도 기획 중이다. 오 회장은 "유스→청소년→유니버시아드→시니어로 이어지는 국가대표팀 선발 및 관리 체제의 고도화가 필요하다"면서 "1회성 선발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태웅 감독도 한국 배구의 국제 경쟁력 강화와 관련해 "예전에는 시즌 뒤 곧바로 국가대표 선수촌에 입촌해 6~9개월 동안 합숙 훈련을 했다"면서 "그런 절대적 훈련 시간이 있어야 실력이 늘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지금처럼 합숙이 짧으면 선수촌의 다른 종목 선수들과 융화하지 못하고 겉돌 수 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훈련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고 짚었다. 김종민 감독도 "당장의 결과를 얻으려 하기보다 바닥을 다져서 장기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연경을 중심으로 최근 몇 년 동안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한국 배구. 그러나 '김연경 효과'에 취해 국제 대회에서 도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다른 종목에 밀려날 수 있다. 과연 한국 배구가 저변을 넓히고 내실을 다져 완전히 인기 스포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