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6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본체만체 하며 서늘한 악수를 건넬 때 이미 알아챘어야 했는지 모른다.
미국은 최근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바이오 등 이른바 'BBC 산업'에 대해 강력한 보호막을 침으로써 한국 내 우려와 반발을 사고 있다. 하나같이 우리가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핵심 전략산업들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5월 한미정상회담 때 한국 기업의 44조원 대미투자에 '땡큐'를 연발하며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불과 몇달 만에 표변했다.
특히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차별 조치는 아무런 사전 설명조차 없었을 만큼 일방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현대차그룹의 대미투자에 사의를 표하며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던 게 믿기기 않을 정도다.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은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을 인용해 "인플레이션 감축법 발효에 대해 한국은 '미국이 등 뒤에 칼을 꽂은 것'으로 여길 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한국 내 분위기를 전했다.
'글로벌 동맹' 격상에 환호하던 정부, 美 전기차 뒤통수에 냉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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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회담으로 잔뜩 고무됐던 대통령실은 돌연 냉가슴을 앓게 됐다. 한미동맹이 안보동맹을 넘어 경제동맹,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됐다고 하더니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당장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는 무엇을 했느냐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법안 처리 과정이) 비공개였고 전광석화처럼 처리돼 손 쓸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한미동맹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거짓이라면 경제안보비서관과 경제안보외교센터까지 신설하며 경제안보를 외치던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것이다.
정부는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을 미국에 급파하는 등 파장을 줄여보려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이 보호주의를 노골화한 가운데 11월 중간선거까지 앞둔 점을 고려하면 한국 사정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정부는 중간선거 이후에는 상황이 다소 호전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차기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기 때문에 미국 우선주의는 오히려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 당한 것은 한국 뿐 아니라 일본과 유럽연합(EU)도 마찬가지라는 항변도 나온다. 하지만 올 상반기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 2위로 올라선 한국과 이들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한국은 기세가 꺾이고 일본 등은 시간을 벌게 됐다.
전문가 "미국은 자국내 생태계 만들겠다는 것"…핵심산업 공동화 경각심
결국 어떤 식으로든 우리 측 피해가 불가피해진 가운데 차제에 보다 긴 호흡의 접근이 요구된다. 개별 산업에 대한 구제도 중요하지만, 유일한 동맹인 미국과도 마찰을 빚게 하는 경제안보 자체에 대한 원론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경제안보는 코로나19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공급망 위기로 불거졌다. 물론 그 근저에는 첨단기술을 둘러싼 미중 전략경쟁이 있다. 미국의 전략은 글로벌 공급망(GVC)을 재편해 중국을 배제(디커플링)하고 추격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그 구체적 수단이 '칩4'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이며 한국은 이미 가입을 천명했다. 중국과의 교역 등 특수한 사정과 보복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한미동맹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는 바이든 정부가 가치와 규범에 의한 국제질서를 옹호하고 동맹을 중시하는 태도가 중요하게 고려됐다. 트럼프의 일방주의 대신 다자주의가 복원되고 동맹과의 이익 공유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였다.
러몬도 상무부 장관(오른쪽) 백악관 브리핑. 연합뉴스하지만 임기 반환점을 앞둔 바이든 행정부의 현 주소는 실망스럽다. 그나마 트럼프는 방위비 증액이나 철강 관세 인상 수준에 그친 반면 바이든표 산업정책은 더 심각한 도전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 선봉장인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의 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는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국행을 원하던 대만 반도체 회사를 미국으로 돌려세운 '무용담'을 자랑하면서 미국이 반도체를 다시 장악해야 한다고 했다.
미 백악관이 이미 지난해 4월과 9월 세계 반도체 기업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미 상무부가 삼성과 SK하이닉스 등에 영업 기밀자료를 요구한 것은 이런 큰 그림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김양희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은 (외국의) 개별 기업 1~2개를 가져가겠다는 게 아니라 아예 자국 내에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경각심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의 차세대 먹거리인 배터리 산업 생태계가 공동화되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안보 다 의존하면 협상력 상실…글로벌 동맹, 호혜적 관계 재설정 필요
연합뉴스문제는 한국의 대미 로비력이 여전히 부실하다는 점이다. 정부 부문 대미 로비액(2016~2020년)은 일본과 근소한 차이로 세계 2위(미 책임정치센터 조사)에 달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성과는 미흡하다.
김영준 국방대 교수는 "우리가 미국을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라며 "바이든의 '중산층을 위한 외교'도 결국은 트럼피즘이되 '착한 트럼피즘'일 뿐 미국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문제도 크게 작용한다.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마당에 경제에서마저 양보를 요구하기는 어렵다.
최근 확장억제전략(핵우산) 협의차 미국을 방문한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전기차 차별 문제도 거론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주는 게 있어야 받을 게 있는 협상에서 핵우산과 전기차를 동시에 부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결국 대미관계에서 안보나 경제 어느 하나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야 이익의 균형을 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의 미래가 걸린 전략산업에서 미국과 진정 대등한 협상을 원한다면 안보 문제는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방식은 전시작전권 환수를 포함한 자주국방이나 북한과의 화해를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 또는 그 둘 다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핵우산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안보 환경을 추구하는 길목에서 한국의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대미 협상력이 높아진다. 이게 미국의 세계전략에 반드시 부합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외에 다른 길은 찾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북 안보동맹을 글로벌 포괄 동맹으로 승격할 때 이미 기회가 있었지만 놓쳤다. 안보 위주의 수혜적 대상에서 경제를 비롯한 포괄적 파트너로 호혜적 관계 재설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미동맹 격상에 도취한 나머지 우리 기업들의 미국 투자‧이전을 경제안보적 관점에서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