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집 사장 윤모(40)씨는 매일 새벽 4~5시부터 가게에 나와 떡을 찐다. 그날도 인절미를 안치고 한숨 돌리던 차였다. '펑' 폭발 소리와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떡집이 흔들렸다.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파편이 길가로 쏟아졌다. 가게 안이 하얀 연기로 가득 차자 윤씨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냉장고가 찌그러지고 주방과 가게 앞에 집기류가 나뒹굴었다.
지난 3월 12일 오전 6시 30분경, 서울 중랑구 면목동 한 떡집에서 떡을 찔 때 쓰는 전기스팀보일러가 폭발했다. 사고에 대해 사장 윤씨는 "2018년에 구매해 4년 동안 쓴 기곈데 전에 이상을 느낀 적도, 사고 전조도 없었다"며 "(사고 후) 걱정돼 요즘엔 압력 게이지에 이상이 없는지 떡 찔 때마다 확인한다"고 말했다.
3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각종 상업시설에서 쓰이는 전기스팀보일러는 증기 사용으로 인해 폭발 위험성이 크지만 안전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압력 제어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등 기기 결함이 있을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데도 제조·유통·사용·수입·수출 등 전 과정에서 안전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전기스팀보일러는 의류공장, 식품 제조공장, 시멘트공장을 비롯해 떡집, 만둣집, 세탁소, 사우나 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기름값이 오른 2005~2010년 무렵부터 비용이 저렴하고 크기도 작은 전기보일러가 산업용·상업용으로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소음이나 환경오염이 적고 설치가 간단하다는 등 장점이 많아 앞으로도 사용이 늘어날 전망이다. 그런데 관련 규제는 기름·가스보일러만 사용하던 과거에 머물러있어 시민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소방청 최근 3년 보일러 화재 통계.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실 제공면목동 떡집 보일러가 폭발한 이유는 기계의 과열방지, 증기자동배출, 압력제어 등 안전장치 3개가 모두 작동하지 않아서 인 것으로 파악됐다. 압력제어 장치가 망가져 압력이 계속 높아지는 상황에서 다른 안전장치까지 작동하지 않아 결국 폭발한 것이다. 지난달 13일 중랑구 면목동 한 옷 공장에서도 전기스팀보일러가 폭발해 불이 났다. 소방 당국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인 가운데 보일러의 전기적 결함이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기스팀보일러는 고온·고압을 사용해 폭발할 경우 피해가 크다. 동아대 임옥근 경찰소방학과 교수는 "물이 100℃가 되면 증기 부피는 1700배 팽창하는데 이때 갑자기 압력이 배출되면 순간적으로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며 "압력 상승으로 고막 파괴나 폐 손상은 물론 주변에 폭발 잔해물이 날아가며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면목동 떡집에서도 지나가던 30대 남성이 손등에 유리창 파편을 맞아 힘줄이 끊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전기스팀보일러는 정부와 관련 기관의 관리 대상이 아니다. 에너지이용합리화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 소관 검사 대상 기기에는 가스나 석유 등 연료 및 열을 사용하는 보일러만 포함된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전기스팀보일러는 전기 이용 스팀 생성 기기이기 때문에 우리 관할이 아니다"라며 "산업부에선 에너지이용합리화법(제2조)상 열사용 기자재 중에서 위험성이 높은 제품을 검사 대상으로 규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기술표준원에서 전기보일러 안전기준을 마련한 걸로 보이니 해당 기관 전기통신제품안전과에서 전기 사용 기기 안전 검사를 시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방청 최근 3년 보일러 화재 통계.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실 제공그러나 국가기술표준원 전기통신제품안전과 또한 "전기스팀보일러는 안전관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해당 과 직원은 "스팀을 써 물 온도가 100℃를 넘어가면 가정용이 아니라 산업용으로 우리 관리 대상이 아니다"라며 "우리는 전력이 10kW 이하인 제품, 전기온수 안전 기준상 물 온도가 98℃ 이하인 제품만 전기온수기로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안전관리법을 확인해보니 '과일 껍질깎이', '전동침대', '구강청결기' 등은 안전확인 대상이었지만, 전기스팀보일러는 아니었다.
소방청 최근 3년 보일러 화재 통계.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실 제공
전기스팀보일러가 정부 안전 기준에서 제외된 탓에 판매 업체들은 자체 검사를 통해 안전성을 보장하는 실정이다. 한 업체 관계자는 "구매자가 인증을 요구하는 경우 인증된 기관 또는 사설 기관에서 검사하고 보일러기 안에 들어가는 전자접촉기나 부품은 인증된 제품을 쓴다"고 전했다.
또 다른 전기스팀보일러 전문 판매업체 대표는 "자체 압력 검사를 시행하고 수출하기 위해 유럽 CE 인증을 받는다"며 "아직 국내 검사 규정이 없어 인증을 받으려고 해도 못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KC인증(안전인증)이라도 받으려고 알아봤는데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에너지이용 합리화법 시행규칙 제31조의6(검사대상기기)에는 가스나 석유 등 연료 및 열을 사용하는 보일러만 포함되고 산업용 전기스팀보일러는 빠져있다.이에 전문가들은 전기스팀보일러 사고 관련 통계와 안전 규제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국교통대 김의수 안전공학과 교수는 "법률상 압력이 아주 높거나 큰 보일러만 관리하고 식당이나 세탁소에서 사용하는 작은 보일러는 관리가 안 된다.""며 "인증이나 승인이 필요한데도 기준 관리 주체가 없어 일반 업체에서 막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전기스팀 사용 제품이 시중에 몇 개 있는지도 몰라 전체적인 통계 파악이 필요하고, 안전을 관리하는 주무 부처가 필요하다"며 "만드는 자격 기준과 설계, 제작, 사용, 관리 관련 규정이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시험 인증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