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 윤창원 기자정치부 기자 시절, 야당 출입기자에게 야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는 일은 웬만하면 삼가는 게 관행이었다. 야당은 약자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다. 지금은 비판 기사에 여야가 없다.
한국정치에서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가 10년마다 돌아가면서 집권하는 것을 넘어 이제 5년 만에 정권이 바뀐 시대가 됐다. 그야말로 권불십년이 아니라 권불오년이다.
국민의힘은 21대 국회가 출범할 때 야당에 할당된 7개 상임위원장직을 모두 포기하면서 민주당 독식 국회를 방치했다.
이후, 임대차 3법 등 각종 법안 처리 과정에서 득보다 실을 절감하고 지난해 7월 원 구성 협상 재개를 민주당에 요청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방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국민의힘은 법사위원장직을 요구했지만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완강히 거부했다.
진통 끝에 여야는 후반기 국회 법사위원장을 국민의 힘이 맡는 것으로 합의하고 원 구성 협상을 마쳤다.
그런데, 대선에서 패하고 야당이 된 민주당이 돌연 입장을 바꿨다. 법사위원장을 민주당이 계속 맡겠다는 것이다. 정부여당을 입법부가 견제해야 한다는 이유다.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은 23일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국민에 힘에 주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고 박홍근 원내대표도 "(후반기 원 구성 문제는) 원점에서 재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향후 2년 원 구성에 대한 협상주체는 현재의 원내대표"라고 밝혔다.
사실상 대놓고 합의를 파기하겠다는 것이다. 정치는 여야 간의 신뢰가 기본이다.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공동비대위원장(오른쪽)과 박홍근 원내대표가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 의원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민주당의 법사위원장직 고수 방침은 정치 도의를 저버리는 것으로 국회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처사다.
집권여당인 국민의 힘이 분명 약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야당이 된 민주당이 약자는 아니다.
민주당은 야당이지만 국회에서 167석으로 과반을 훨씬 넘고 여러 사정으로 탈당이나 제명된 의석에 6월 1일 보궐선거 결과까지 더해지면 180석에 육박한다.
최근 검수완박으로 불리는 검찰수사권 조정안 통과 등에서 보듯이 입법부 차원에서는 집권여당을 압도한다.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독차지하겠다는 민주당 측의 의지를 국민의 힘이 "입법 폭주를 계속 자행하겠다"는 뜻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지나온 길은 반드시 흔적으로 남는다. 발자국이 남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손실보상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안에 대해 시정연설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본회의장을 퇴장하며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하루아침에 여당이 야당이 되고 야당이 여당이 되는 대한민국 정치가 됐다.
야당이 됐다고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여야 합의를 깰 수는 없다. 민주당은 불과 며칠 전까지 여당이었다.
민주당이 수권야당으로 거듭나 다시 집권하려면 책임감 있는 모습부터 보여야 한다.
이렇게 정치적 합의를 휴지조각처럼 내버린다면 국민들은 5년 뒤에도 여전히 힘자랑하는 야당에 공감과 동정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법사위원장직 고수는 국회를 파행으로 몰고 가는 것이고 야당이 협치를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법사위원장을 집권여당에 내주고 다른 정치적 대가를 얻는 것이 현명하다.
국민들은 민주당을 약자로만 보지 않는다. 야당이 됐다고 무작정 온정만 받던 시절은 지났다.
민주당의 현명한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