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연합뉴스달러화에 대한 엔화 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국내 산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일본과 수출 경쟁을 하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 엔화 가치 하락은 한국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7일 금융권과 산업계에 따르면 지난 24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은 장중 한때 122.40엔을 기록하며 2015년 이후 최고치(엔화가치 하락)를 기록했다. 이에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1천원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엔화는 대표적인 안전자산 중 하나로,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위기 상황에서 투자심리가 나빠지면 매입 수요가 늘어나 통상 강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등 지정학적 위험 고조에도 약세를 보이는 것은 미국, 일본 간 통화정책 차별화와 일본 정부의 추가 경기 부양책 실시 기대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8%에 육박하는 물가상승률을 완화하기 위해 연내 7차례 금리 인상을 예고했으나, 일본은 경기부양을 위해 통화정책 완화 기조를 유지하면서 양국 간 금리차가 벌어져 엔화 약세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엔화 약세는 일본의 수출 기업에는 유리하고,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 기업에는 불리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2010년대 초중반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이 80엔대에서 120엔대로 치솟으면서 한국 수출 기업들이 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엔저 현상은 한국 입장에서 아직 우려할만한 단계는 아니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특히 엔저와 원유가격 상승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주요 에너지를 100% 수입하는 일본 경제에 오히려 더 부담을 준다는 분석도 있다.
하나금융투자의 서예빈 연구원은 "지정학적 리스크로 국제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상승해 일본의 수입 증가율이 높아지면서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 폭도 급격히 커지고 있다"면서 "엔화 약세에도 일본 경제는 당분간 부진할 것이며 일본 기업들의 마진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다만 하반기까지 엔저 현상이 장기화하면 국내 산업계에도 업종별 피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과 수출경합도가 높은 석유화학, 철강, 기계, 자동차 등의 업종이 '엔저 영향권'에 들 가능성이 거론된다.
신한투자증권 김찬희 연구원은 "엔저가 장기화하면 철강이나 기계 등의 업종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면서 "다만 전방 수요가 양호한 석유나 자동차 업종은 피해가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도체 등 전자기계 업종은 피해가 미미할 것으로 전망됐다.
통신기기는 일본보다 한국이 경쟁 우위에 있고, 반도체의 경우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일본은 시스템 반도체에 주력해 경쟁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조선업종도 전체 수출 경합도는 높지만 주력 품목이 차별화돼 있어 피해가 덜할 것으로 관측됐다. 오히려 일본에 대한 부품 의존도가 높아 원가 절감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