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대구 달성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입주할 사저 인근에 안전 펜스가 설치돼 있다. 대구=박종민 기자박근혜 전 대통령이 병원 치료를 마치고 24일 대구 달성군 사저에 입주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박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검보 중 하나였던 윤 당선인이 박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해 안부를 묻는 장면은 적어도 지난 2016년 이후로 상상조차 힘든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수사와 국정농단 특검 등 굵직굵직한 수사로 연결된 두 사람의 '악연'은 윤 당선인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박 전 대통령이 사면·석방되는 기이한 '인연'으로 이어졌다. 정부의 사면 결정 직후 '윤석열의 아킬레스건을 노렸다', '야권 분열을 노린 술책이다' 등의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이 비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윤 당선인의 정치적 입지가 커졌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이 석방이 빨라졌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가정에 다다르게 된다."사람에 충성 않는다"… 尹 데뷔시킨 국정원 댓글수사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불거진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부터 윤 당선인과 박 전 대통령의 본격적인 악연은 시작됐다.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게 된 윤 당선인(당시 여주지청장)은 국정원 직원 4명에 대한 체포 및 압수수색을 진행하다 수사팀에서 전격 배제된다.
당시 검찰은 윤 당선인이 상부에 사전 보고 없이 체포·압수수색을 진행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지만,
윤 당선인 본인은 수사 과정에서 검찰 수뇌부의 외압이 있었다는 폭로로 맞불을 놨다. 특히 실세였던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수사 외압의 실체로 지목하면서 박근혜 정부와 정면충돌도 피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국회사진취재단같은 해 10월, 윤 당선인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 자택으로 찾아가 체포와 압수수색 관련 보고를 했는데, (조 지검장이) '야당 도와줄 일이 있는가'라며 화를 냈다"라고 말했다. 단숨에
국민적 관심사를 끌어낸 "(저는 검찰 조직을) 대단히 사랑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라는 발언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은 윤 당선인을 향해 "하극상의 행태는 법 원리를 무시한 것이다. 검찰의 지휘 체계가 마치 대지진처럼 붕괴돼 실로 충격적"이라며 맹폭을 가했다. 현재 권력에 맞선 대가는 비쌌다. 윤 당선인은 국정감사 이후 정직 등의 징계를 받았고, 지방을 전전하며 좌천의 길을 걷는다.
연이은 좌천 속… 朴 국정농단 특검으로 다시 등장
대구고검과 대전고검 등에서 평검사로 지내던
윤 당선인은 2016년 터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으로 다시 국민적 주목을 받게 됐다.
당시 국정농단 사건의 특검으로 윤 당선인이 직접 언급되기도 했지만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미 이번 정권 초기 칼을 들어 (박 전 대통령에게) 상처를 낸 사람인데, 정권의 힘이 다 떨어진 이런 상황에 또 같은 대상을 놓고 칼을 든다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며 고사 의사를 강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영수 특검은 특검보를 정하기에 앞서 윤 당선인을 설득해, 수사팀장에 먼저 임명하는 이례적 결정을 내렸다.
수사 실무를 지휘하고 20명에 달하는 파견 검사를 통솔하는 자리로 사실상 특검의 2인자 자리였다.그렇게 다시 여론의 중심에 선
윤 당선인은 비선실세인 최순실씨에게 로비를 한 의혹이 제기된 삼성에 대한 수사를 중점적으로 맡았고, 이재용 부회장을 이듬해 12월, 구속영장 청구 2차례 만에 뇌물죄로 구속기소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는 이후 박 전 대통령의 뇌물죄 입증에 큰 역할을 했고, 최순실 씨 구속, 박 전 대통령 탄핵·구속 등으로 연결됐다. 윤 당선인은 최초의 대통령 탄핵과 이어진 박근혜 정부의 몰락을 이끈 공적을 인정받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악연 속 인연? … 尹이 커지자 朴이 석방됐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서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등을 내리 맡으며 이어졌던 승승장구는 오래가지 못했다. 윤 당선인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 수사를 기점으로 문재인 정부와 충돌했다. 극심한 갈등 속에 윤 당선인은 검찰총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곧바로 자신이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없는 새누리당의 후신, 국민의힘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다.
정권교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지만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서 윤 당선인의 훈장이나 다름없던 특검 경력은 원죄로 뒤집혔다. 박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진두 지휘했다는 점에서 부담이 컸던 윤 당선인은 전통 보수층의 표심을 잡기 위해 정치 참여 선언 이후부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지난해 7월 대구를 찾아서는 "마음속으로 송구한 부분이 없지 않다. 저 역시 전직 대통령의 장기 구금을 안타까워하는 분들의 심정에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다"라고 미안함을 나타냈다. "대통령이 헌법이 부여한 고귀한 권한을 좋은 뜻에서, 국민 통합을 위해서 잘 행사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라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8.15 특별 사면의 필요성을 꺼내기도 했다.
황진환 기자하지만 대선후보 경선 레이스 내내 윤 당선인에게 있어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계륵과도 같았다. TK 민심을 얻기 위해 섣불리 특검 수사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치권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윤 당선인의 정치적 약점이라는 분석이 줄을 이었다.
그해 11월 5일 윤 당선인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은 이같은 시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 한달여 뒤인 12월 24일 박 전 대통령은 4년 9개월의 수감 생활 끝에 특별사면됐다.당시 정부는 사면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의 건강 악화를 언급했지만, 야권 내에선 박 전 대통령을 석방해 윤 당선인을 흔들고 야권 지지층을 분열시키려는 의도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분명한 사실은
윤 당선인의 정치적 입지가 커지면서 박 전 대통령이 석방이 예상보다 앞당겨졌다는 점이다. 윤 당선인 때문에 수감되고 윤 당선이 때문에 풀려났다는 호사가들의 분석은 지금도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적과도 같은 악연에서 한배를 탄 동반자 관계로 뒤집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윤석열 대통령 임기 동안 또 어떤 전환점을 맞을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