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씨가 23일 사망했다. 연합뉴스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향년 90세.
12·12 군사 쿠데타 동지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별세한 데 이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전 전 대통령도 세상을 등졌다.
1931년 1월 23일 경남 합천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전씨는 대구공고를 거쳐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뒤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고 무인'(武人)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하나회는 훗날 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핵심 기반이 됐다.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육군 대위였던 그는 육사에 근무했던 장교들과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들게 됐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담당 비서관에 임명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이후 1963년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핵심 조직이던 중앙정보부의 인사과장을 거쳐 1969년에는 육사 동기생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 육사 출신들의 선망의 근무처이던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 자리에 임명됐다.
1980년 8월 18일 최규하 전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를 떠나기 전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과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데 이어 정권 찬탈을 위한 '12·12 군사반란(쿠데타)'을 일으키고 이듬해 중장으로 셀프 진급, 다섯 달 후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고 정적들을 탄압했다. 같은 해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했다. 그해 8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1대 대통령이 된 전 전 대통령은 1981년 7년 단임 대통령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통과시킨 후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전씨가 검찰 소환 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전씨는 이후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버티다가 체포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전두환 정권은 이후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시행하며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에 주력했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신군부 정권의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 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하에 설치한 삼청교육대에 무고한 일반인들까지 구금하며 악명을 떨쳤다.
박정희 정부 시절의 반공법을 흡수 통합한 국가보안법은 사상 통제와 민주화운동 억압의 핵심 도구로 사용됐고 1980년 이후 7년 동안 국보법 위반 혐의로 1535명이 기소됐다.
전 전 대통령은 또 계엄사령부의 보도검열단 기능을 그대로 문화공보부 산하 홍보조정실로 넘겨 상시화하고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와 함께 만든 '보도지침'을 매일 모든 신문ㆍ방송사에 내려 보도방향을 강제했다. 신문의 글씨 크기와 면 배치, 방송의 큐시트까지 통제했다. 밤 9시 뉴스 시보가 '땡~' 하고 울리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던 이른바 '땡전뉴스'는 KBS와 MBC에서 5공화국 내내 이어졌다.
지난 5월 1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씨 자택 앞에서 열린 '5.18 광주민주항쟁 41주년 서대문지역 제 단체 기자회견' 후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전 씨의 자택 대문 앞에 '학살2' 시와 규탄 문구가 적힌 피켓을 부착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했다. 정치인은 물론 재야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면 가차 없이 잡아들여 고문을 자행했다.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던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강제감금·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수사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 사망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커졌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빗발쳤다. 전 전 대통령은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1987년 6월29일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면서 5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전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 임기를 모두 마치고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1988년 퇴임 뒤 국회에서는 이른바 '5공 청문회'가 진행됐고 전 전 대통령은 재산 헌납을 발표한 뒤 백담사에서 은거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반란수괴죄와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돼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이듬해 복권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군사 쿠데타와 5·18 유혈 진압을 비롯한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검찰은 2003년 2월 당시 1872억 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을 공개해달라고 법원에 요구했지만 그가 제출한 재산목록에는 '현금은 없고 예금과 채권을 합쳐 29만1천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박종민 기자전 전 대통령 재산을 추징하기 위해 2013년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범인 외의 제3자가 그 정황을 알면서 취득한 불법재산과 그로부터 유래한 재산에 대해, 그 제3자를 상대로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공무원범죄몰수법에 신설한 것이다. 그 뒤 검찰은 대대적인 수색과 압류에 나섰고 결국 2013년 9월 전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미납 추징금 1672억 원을 모두 내겠다고 장남 재국 씨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미납 추징금은 966억 원으로, 판결로 추징금이 확정된 후 24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절반 가까이 환수되지 못해 환수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