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글로벌 공급망 회복 관련 정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미국 정부의 반도체 정보 요구 제출 시한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조 바이든 대통령은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에 참석한 동맹국들을 불러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영업상 기밀을 제외한 최소한의 정보만 제출할 예정이었던 한국 반도체업계가 느끼는 압박은 더 커졌다.
2일 업계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G20 회의 도중 별도 세션으로 14개국 정상을 소집해 글로벌 공급망 정상회의를 진행했다. 중국은 빠지고 한국을 비롯해 유럽연합과 독일·호주·캐나다 등 주요 동맹국이 회의에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들을 향해 "여러분 나라의 국가 안보를 위한 중요한 비축물자를 보강할 것을 촉구한다"며 "하지만 오늘날 많은 도전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인 조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조정이 필수"라고 언급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공급망 관련 글로벌 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바이든 대통령은 이어 "실패할 수 있는 하나의 소스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공급망은 다각적이어야 한다"면서 "공급망 회복력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전세계 노동자들이 상품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우리 공급망이 강제 노동과 아동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자의 존엄성과 목소리를 지원하고, 우리의 기후목표에 부합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지속가능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는데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국 정상을 불러 '세계의 굴뚝'인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미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재차 드러냈다는 것이다. 다만 중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은 채 국제사회의 협조를 당부하면서 추가 자금 지원과 함께 국방 비축분을 방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도 공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누볼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공급망 관련 글로벌 정상회의에 참석,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발언을 경청하는 모습. 연합뉴스문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최근 물류 차질이 한층 심각해지면서 세계 경제의 최대 불안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기업들이 자유로운 교역과 투자를 통해 더욱 촘촘한 공급망을 구축하도록 개방적이고 공정한 무역 질서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로서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한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다.
실제로 G20 정상회의에 불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인위적으로 소그룹을 만들거나 이념으로 선을 긋는 것은 간격을 만들고 장애를 늘릴 뿐이며 과학기술 혁신에 백해무익하다"고 말했다. 중국을 고립시키는 미국에 불쾌함을 표한 것으로 해석된다.
발언하는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연합뉴스이와 관련해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1일 KBS '사사건건'에서 세계 여러나라가 연대와 협력을 통해 해결하지 않으면 경기회복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우리의 입장을 미국과 중국에 대의명분을 가지고 충분히 설명하면서 우리 국익 중심으로 해 나가면 될 일"이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오는 8일(현지시간) 마감되는 반도체 정보 제출 시한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재차 강조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의 부담감은 더 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정보 제출에 대한 압박이 더 심화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초 우리 기업은 미국 정부에 사실상 영업 기밀에 해당하지 않는 최소한의 자료 제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달 20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기업이 계약상의 비밀 유지 조항이나 국내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 선에서 제공할 수 있는 자료를 검토해서 제출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미국 기업들은 자국 정부 방침에 적극 협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 상무부 대변인은 "인텔, GM, 인피니온을 포함한 기업들이 조만간 정보를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며 "우리는 이런 노력에 감사하고 다른 기업들도 동참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미국 현지 언론을 통해 SK하이닉스도 정보 제공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어느 정도 수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 기업들은 미국에 제출할 정보의 범위를 놓고 막판까지 고심할 수밖에 없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26일 "(미 정부의 정보 제출 요구에)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 차분히 잘 준비하고 있다"고만 언급했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170억달러(20조원)가 들어가는 미국 파운드리 제2공장 투자 계획 때문에 셈법이 더 복잡하다. 연방 정부 차원의 보조금을 타내려면 미국정부에 반기를 드는 모양새는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한국과 대만에 반도체 생산을 의존하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위험하며 미국에서 반도체가 생산되도록 미국 정부의 보조금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 상원은 지난해 제정된 '미국 반도체법(CHIPS for America Act)'의 후속 조치로, 반도체 제조 시설 등에 520억달러(약 61조1천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지난 6월 처리했다. 하원에서는 일부 의원들이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에만 연방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법안의 최종 통과가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