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 연출을 맡은 신원호 PD. tvN 제공단순한 '복고' 감성이 아니라 진정성 넘치는 공감과 따뜻함이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이어 '슬기로운' 시리즈까지, 예능으로 시작해 드라마로 자신만의 '월드'를 구축한 신원호 PD의 이야기다.
'신원호 월드'에는 '마라맛' 전개도, 역대급 '빌런'도 없다. 다만 어떤 소재와 배경이든 '사람 사는 이야기'를 고봉밥처럼 눌러 담는다. 어떻게 보면 너무 정직한 '순한맛'에 시청자들은 울고 웃으며 치유 받는다. 격변하는 세계에서 '진심은 언젠가 통한다'는 신원호 PD의 느릿한 철학은 역으로 특별해진다.
가끔 '복고' 콘텐츠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인해 '시대정신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범하게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시리즈마다 신원호 PD의 이 원칙은 한결 같다.
시즌2까지 이어진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주1회 시즌제 편성에 다시 예능 PD 세포를 되살려 유튜브 콘텐츠까지 진출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함께 한 지난 1년 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신원호 PD와 나눈 인터뷰 일문일답.
Q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시즌1에 이어 시즌2까지 시청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종영 소감과 함께 연출자로서 생각한 인기 요인은A 보시는 분들이 각기 매력을 느끼는 부분들, 예를 들어 누군가는 다섯 동기들의 '케미', 또 음악 혹은 밴드, 환자와 보호자들의 따뜻한 이야기, 러브라인, 많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에 호감을 갖고 들어오셨다가 또 다른 포인트들에 매력을 느끼시고 사랑을 주신 것 아닐까 짐작한다. 그 중 하나를 굳이 꼽으라면 아마도 다섯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캐릭터와 케미스트리, 그리고 그들이 그려내는 율제병원 안의 소소한 사람 이야기에 점수를 많이 주신 것 아닐까 싶다.
시즌2로 국한해서 생각해보면 단연 '내적 친밀감'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시즌1에서 시즌2로 건너오며 생긴 2년여의 시간속에서 드라마 자체와의 친밀감, 캐릭터, 배우들과 갖게 되는 내적 친밀감이라는 게 생긴다. 익히 아는 캐릭터, 관계,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에 거리감이 많이 좁혀졌던 게 시즌2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Q 2개의 시즌 동안 함께 호흡한 배우들과의 기억도 남다를 것 같다. 배우 조정석·유연석·정경호·김대명·전미도, '99즈'와의 2회차 호흡은 어땠나
A 신기한 경험이었다. 첫 촬영날도 그랬고, 다섯 명이 모두 모인 씬을 처음 찍던 날도 그랬고, 시즌1 이후 10개월 가까운 공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같이 어제 찍다가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첫 촬영이라 하면 으레 거쳐야 하는 과정들이 있다. 서로의 호흡을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부분이 아예 생략되고 물 흐르듯이 진행되다 보니까 그게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배우들이며 스태프들도 현장에서 이런 얘기를 많이 했었다. 스태프들, 배우들 간의 내적 친밀감도 2년여의 시간 동안 어느새 두텁게 쌓이다 보니 시즌2는 훨씬 더 촘촘한 케미로 이어질 수 있었고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다.
Q 특별출연 해주신 배우분들도 있었고, 탁구 대회 에피소드에서는 현정화 감독 등 진짜 선수 출신이 나오기도 했다.A 특별출연 해주신 배우분들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 뿐이다. 늘 빚지는 기분으로 연락 드리고, 늘 술 백 번 사겠다고 말씀드리는데, 사실 시즌1 특별출연 해주신 분들에게도 시국이 이러다 보니 자리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언제고 꼭 연락 드리고 한 분 한 분 찾아 뵙겠다.
현정화 감독님의 경우 너무 감사했다. 탁구 대회 에피소드는 스토리 전개 상 마지막에 어마어마한 고수가 나와 주셔야 했고, 그래서 현정화 감독님께 연락 드렸다. 복식이다 보니 선수 한 분이 더 필요했었는데 직접 발벗고 나서서 열심히 섭외를 해주셨다. 올림픽이 코앞이라 섭외가 쉽지 않았는데도 끝까지 섭외를 해주셨고, 너무 감사하게도 주세혁 선수가 함께 나와 주셨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연기를 하시는 분들도 아니신데 두 분 모두 대사 연습도 많이 해 오셔서 연기도 흠 잡을 데 없었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 뿐이다.
Q 탁구 대회 에피소드는 마침 절묘하게 올림픽 시즌이 딱 끝난 후 방송이 됐다A 올림픽 시즌을 염두하고 만든 에피소드는 전혀 아니다. 처음 초반 기획 때부터 예정돼 있었던 에피소드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렇게 수많은 과들이 모여서 탁구 대회를 한다는 것 자체도 재미있는 그림일 것 같았지만, 그보다도 지금까지 못 보여드렸던 여타 과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대진표에 적힌 수많은 과들의 이름만 봐도 '병원 안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구나, 환자 한 명을 보기 위해 그저 한 두개의 과만 움직이는 게 아니구나'라는 느낌이 전달됐으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탁구 대회를 빌었던 거다. 사실 탁구 대회가 포함된 9화의 큰 맥락이 그거였다. 수많은 과의 수많은 분들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tvN 제공Q 시즌2에서 시청자들의 관심이 가장 컸던 부분은 바로 '99즈'의 로맨스 결말이었던 것 같다. 연출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A 물론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다 보이겠지만 워낙 로맨스만의 드라마가 아니다보니 러브라인의 흐름이 빠르거나 밀도가 촘촘할 수가 없다. 연출자의 입장에서 다른 장면들에 비해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아마 그런 점들 때문에 조금 더 차근히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살짝 느릿하게 호흡을 더 가져가려 했던 정도 였던 것 같다. 실제 그 호흡, 그 분위기, 그 공간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연출하려 했던 장면들이 많았다.
Q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주1회 시즌제, 새로운 시청 패턴을 이끌었다. 시즌2까지 마친 지금, 직접 경험한 시즌제 드라마의 장단점, 그리고 주1회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느낀 강점이 있다면A 이제 주2회 드라마는 다신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2개씩 했었던 전작들은 어떻게 해냈던 건지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 간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스탭과 배우들 모두 공히 피부로 체감하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현장의 피로함이 줄어드니 그 여유가 결국 다시 현장의 효율로 돌아오게 된다. 그 점이 주 1회 드라마가 가진 최고의 강점 아닐까 싶다. 매회 그 어려운 밴드곡들을 위해 연기자들에게 여유있는 연습시간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도 주1회 방송이라는 형식이 준 여유 덕분이다.
시즌제의 가장 큰 강점은 내적 친밀감 아닐까 싶다. 모든 드라마가 마찬가지겠지만, 제작진에게 가장 큰 숙제는 1회다. 1회에서 드라마의 방향성과 캐릭터들을 효과적으로, 지루하지 않게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 하는 것이 늘 큰 고민인데, 시즌제에선 시즌1을 제외하고는 그 고민을 생략하고 시작할 수 있다. 그냥 바로 이야기가 시작되어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고 이미 친한 캐릭터, 익숙한 내용들이다 보니까 쉽게 받아들이고 접근할 수 있다. 기획을 할 때 예상을 했었던 부분이긴 해도 이 정도로 큰 강점으로 올 줄은 몰랐었다. 제작 단계에서도 편리하다. 캐스팅이며 로케이션이며 세트며 소품이며 의상이며 모든 면에서 각기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을 보충하는 것 외에는 이미 세팅돼 있는 부분들이 많다보니 준비기간도 어마어마하게 단축된다. 그래서 중간에 '하드털이'도 할 수 있었던 거고…. 어쨌든 여러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이고도 영리한 형식인 건 확실하다.
Q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철저하게 기획된 시즌제·IP 전략의 성공이라는 평가가 많다. 특히 시즌1과 시즌2 사이의 공백을 매주 공개한 '하드털이'가 채웠고, '슬기로운 캠핑생활'도 방송됐는데 어떤 과정을 거쳤나A 시즌제 드라마를 만들면서 가장 신선했던 부분이 시즌1의 마지막 회와 시즌2의 첫 회였다. '이렇게 끝내도 돼?' '이렇게 시작해도 돼?' 싶은 느낌이 들어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다만 기다리시는 입장에서는 마치 12회를 끝나고 13회를 1년 동안 궁금해하며 기다려야 하다보니 그 부분에 대한 보상을 좀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하드털이'를 시작하게 된 첫 번째 이유다. 보통 드라마에서 못 보여드렸던 장면은 블루레이나 DVD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한정적인 분들이 보시는 것 보다는 공개적으로 시즌2를 기다리시는 많은 시청자분들이 보실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유튜브라는 매체를 실질적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5~10분 사이로 짤막하게 하고 싶었는데, 하면 할수록 분량이 늘어나고 점점 더 꼼꼼하게 체크하게 되고 하다 보니까 갈수록 예능 할 때 만큼이나 힘들었었다. 드라마 준비도 해야하고, 거기에 매주 하나씩 콘텐츠를 편집하며 자막, 음악도 넣고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주 하나씩 편성 된 거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편 너무 재미있었다. 10년 만에 예능을 하는 셈이다 보니까. 처음에는 내가 10년 만에 자막을 뽑을 수 있을까, 예능 감이 떨어져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예전에 그 세포들이 다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 할 때보다 더 즐기면서 했던 것 같다.
tvN 제공'슬기로운 캠핑생활'의 경우는 정말 순수히 배우들로부터 시작된 콘텐츠였다. 시즌2 준비과정과 겹치면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렇게 단순하고도 순수하게 컨텐츠가 시작될 수 있다는 점, 순수한 진심으로 만들면 큰 기술 없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우연한 콘텐츠 하나가 '출장 십오야' 같은 다른 줄기로도 충분히 확장돼 갈 수 있다는 점들을 목격하면서 수년간 쌓아왔던 많은 편견들을 스스로 깨트릴 수 있었던 놀라운 경험이었다.
Q 이번 시즌2에서 담지 못해 아쉬운 이야기가 있을까. 시즌3 제작 여부도 궁금하다A 환자와 보호자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애초에 기획했던 것은 정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주된 축이었기 때문에 할 이야기, 에피소드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마치 우리 일상이 오늘 지나면 또 내일의 이야기가 있고, 내일 지나면 모레 이야기가 있듯이 '99즈'의 일상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다만 시즌제를 처음 제작하면서 쌓인 이런저런 고민들과 피로감들이 많다보니 그 이야기를 다시금 이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나중에 어떤 우연한 계기가 생겨서 시즌3가 탄생할 수는 있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정말 아무 계획이 없다. 기대해 주시는 시청자분들이 있다는 것, 배우들과 스태프들 또한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건 너무 감사하고 감동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Q 일각에서는 '그 시절'을 빛나게 추억 보정할뿐 시대정신이나 그림자를 지워버린 '복고 판타지'라는 비호평을 내놓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연출자의 생각이 궁금하다A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해당되는 질문이 아니고 '응답하라'에 관련된 질문인 듯 하다. 사실 누구보다도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하지만 만약 시대적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전혀 다른 접근방식으로 과거를 다뤘을 것이고 '응답하라'가 아닌 다른 틀거리를 선택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응답하라 1997'로 시작된 '응답하라' 시리즈는 과거를 아련함 혹은 훈훈함, 혹은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추억하는 정서가 출발점인 드라마다.
누군가에겐 암흑의 시대라고만 생각하는 시절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 삶들에 관한 이야기에 시대정신을 자랑하고자 정치적, 사회적 이야기를 무리하게 끼워넣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작법이다. '응팔'(응답하라 1988')에서 운동권인 보라의 이야기를 더 크게 확장시키지 않았던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였다. 결국 어느 지점에 포커싱을 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기획의도가 어디 지점에 있느냐에 따라 과거를 어떻게 바라볼 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소재를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한 사고방식 아닐까 싶다.
Q '응답하라' 시리즈부터 '슬기로운 의사생활'까지 마치 '신원호 월드'처럼 작품을 관통하는 '복고' 감성이 있다. '지금 현재'가 아닌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다루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또 이런 이야기들이 시청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A '응답하라' 시리즈의 경우는 결국 시간에 관한 드라마다. 지나온 시간, 그 시간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게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 정서들이 있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시간이 이만큼 흘렀고, 앞으로도 분명히 시간은 흐를 거고 결국 무한한 것은 없겠구나, 하는 무의식적인 정서들이 깔리게 된다. 과거의 이야기가 지닌 힘이 결국 그 정서 아닐까 싶다. 지나간 시간이 주는 아련함,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 여러가지 정서가 겹치면서 묘하게 가슴 아프고 애틋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