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3,4호기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해마다 여름철 전력부족이 국가적 이슈로 부상하는 데다 석탄발전소 퇴출이 글로벌 대세가 되면서 원전폐지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전해체에 수천억원을 투입한데 이어 관련 산업을 육성한다며 또다시 거액의 예산을 책정해 예산낭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비판의 기저에는 원자력발전을 유지할 것이냐 축소할 것이냐의 문제는 어느 쪽이 옳고 반대 쪽이 그른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을 정책의 추진방향으로 선택하느냐의 문제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문재인정부는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원자력발전을 점차 퇴출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수명이 다한 오래된 원전부터 해체하려는 계획을 수립 시행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초인 2017년 6월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을 갖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원전폐로에 착수했다. 이 때 원전해체연구소를 세우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2021년 9월 현재까지 해체대상으로 선정된 원자력발전소는 고리1호기와 월성1호기 등 2개 원전이다. 고리1호기는 이르면 2022년 하반기 해체가 시작될 예정이지만 그 전에라도 조기발주가 가능한 해체작업은 최대한 발굴해 해체를 추진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원전기업의 해체수요를 최대한 창출함으로써 원전해체를 산업화하겠다는 정부의 구상 때문이다.
고리1.2호기의 변전소 송전탑 이전 설계와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설계용역은 2019년 발주됐고, 해체폐기물 처리장비 구매와 터빈건물 철거공사도 2021년 발주됐다. 월성1호기의 경우도 중수로 해체용역과 방사성폐기물 시설 설계 등의 사업이 이미 발주됐다.
청와대 주도의 원전폐로가 진행되면서 사업은 속도감 있게 추진된다. 예산은 넉넉하게 집행됐고 원전 관련 공기업과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협조도 이뤄지고 있다. 원전 해체비용은 한수원이 원전 1기당 매년 8900억원을 충당한 기금을 활용하지만, 원전 해체 원천기술과 상용화기술 개발을 위해 지금까지 산업부는 2241억원, 과기부는 1032억원의 막대한 예산도 투자하고 있다.
산업부 원전해체 상용화 기술개발 및 R&D 사업 현황(구자근 의원실 제공) 단위 : 백만원
24일 국회 산업위 소속 구자근 의원이 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산업부는 원전 해체에 필요한 상용화 기술 58개 중 54개를 확보했고 나머지 4개는 연내에 개발을 완료할 예정이다. 과기부는 핵심 원천기술 38개 가운데 28개의 개발을 마쳤다. 개발률은 95%에 이른다. 정부관계자는 24일 "원전 해체기술을 그동안 많이 개발했고 일부 남은 기술의 개발도 올해 완료된다"고 말했다.
핵심기술과 상용화기술 개발이 거의 마무리된 상황에서 원전해체 관련 연구소 2곳의 설립이 추진되자 중복투자라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는 2019년 11월부터 총 3223억원이 드는 원전해체연구소 건립에 나섰다. 경영여건이 나쁜 한수원은 여기에 2000억원이나 출자했다.
구자근 의원은 "기술개발이 끝난 상황에서 연구소 설립이 추진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며 "한수원 스스로 주력사업인 원전 해체를 위해 2000억원의 비용을 부담해 앞장서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고 반문했다.
기술개발률이 95%인데 원전해체 R&D 예타(예비타당성검증)에 나서고 연구소를 세우는 건 예산의 중복투자 아니냐는 문제의식이다. 정부는 개발된 기술의 실증과 기술 고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021년 연말 원천기술 개발을 마무리하면 원전 선진국 기술수준의 90% 정도인데, 10년에 걸친 기술고도화로 선진국 기술을 완전히 따라잡겠다는 것이다.
원전 후발국인 한국은 아직껏 한개의 원전도 해체해 본 적이 없는 나라다. 게다가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0으로 좁히려면 앞으로도 10년의 세월이 걸리고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하는 불리한 처지다. 더구나 애써 기술경쟁력을 확보한다고 해도 일부 선진국에 집중돼 있는 원전을 해체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란 쉽지 않은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는 문재인정부 이전까지 수명이 30년 넘은 원전(고리1,월성1호기)을 각각 10년씩 연장해 사용해왔다. 전체 26기의 원전 가운데 가동중인 원전들은 차례로 사용연한에 이르면서 2023년부터는 연장해서 사용할 지 폐로할 지 결정의 순간들이 잇따를 예정이다. 한편으로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원전정책의 뼈대가 바뀔 여지도 있어 해체일변도의 정책추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2030년부터는 탄소중립의 대세에 따라 국내 화력발전소가 점차 폐쇄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원전정책에서도 폐지와 유지 논란보다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용 쪽으로 초점이 모아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