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는 담화를 낸 10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남북한 군초소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는 아무래도 북측에 있는 대남전문가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남한의 돈이 들어간 자산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북한 자신들의 영토 안에 있는 것이다. 폭파를 한다고 해서 실익이 크지 않다.
남북관계는 언제나 부침이 있기 마련인데, 이후에 남북관계를 개선할 시점이 되면 폭파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결국 장애를 조성한 셈이다.
북한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건물까지 폭파한 것은 멀리 보지 않고 즉흥적인 결정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김여정 북한 당 부부장 주도로 이뤄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한 고위 탈북민의 견해이다.
치밀한 北 각본? 구멍도 많다
지난 달 27일 남북 통신선 복원 이후 김여정 부부장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두 차례 담화를 내고, 마침내 "엄청난 안보 위기를 시시각각 느끼게 할 것"이라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담화까지 나왔다.
남북정상의 합의에 따른 남북연락채널 복원에서 김영철 부장의 협박 담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북한의 치밀한 사전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평가가 많이 나왔다. 북한이 통신선 복원에 나설 때부터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압박하려는 각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에는 사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치밀한 각본에 당했다는 질책이 담겨 있다. 그런데 '치밀한 사적 각본'이라고 한다면 북한의 향후 대응 조치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의 대응조치가 현 시점에서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 있듯이 통신선 복원 시점에서도 북한에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항상 치밀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치밀해 보인다고 해서 그 결과가 항상 긍정적이었던 것도 아니다.김여정 부부장이 지난 10일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2차 담화를 조선중앙통신에 발표한 것이 오전 8시였다. 핵 능력을 뜻하는 '절대적 억제력'과 '선제 타격능력'의 강화를 언급하며 "남조선 당국자들의 배신적인 처사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 김여정의 담화에도 불구하고 남북은 한 시간 뒤인 9시에 연락 채널의 개시 통화를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김여정의 담화가 갑자기 나왔거나, 아니면 하부에 바로 전달되지 못한 정황을 암시한다. 작지만 치밀하다고 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통신선 복원 6일 뒤 나온 김여정 담화는 오히려 역효과
지난 7월 27일 남북 간 통신연락선이 복원되자 군 관계자가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활용해 시험 통화를 하는 모습. 국방부 제공13개월만의 남북 통신선 연결에 따른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김여정 부부장의 2일 담화이다. 김 부부장이 통신선 복원에 대해 "단절되었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시켜놓은 것 뿐"이라고 하면서, 일각에서 제기되는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때 이른 경솔한 판단"이라고 밝힌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통신선이 복원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한미연합훈련이 남북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 것"이라며, "희망이냐 절망이냐" 선택을 압박한 것은 논의 지형을 크게 축소시켰다.
정부가 한미연합훈련의 향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김여정의 담화를 주요 변수로 고려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훈련연기의 필요성을 제기해온 정부부처로서는 '김여정 하명 프레임' 때문에라도 운신의 폭이 현실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물론 남북의 물밑 접촉 과정에서 김여정 부부장이 언급한 '배신적 처사'에 해당하는 비공개 정황이 혹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 훈련에 대해 코로나19와 전작권 전환 등 군사적 수요와 함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기 위한 여건 조성 문제도 "충분히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전을 위해 당초 예정보다 훈련 규모를 크게 축소한 것인 만큼 북한도 유연하게 나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한미연합훈련에 참여할 병력이 통신선 복원이 된 지난달 27일 이전부터 이미 한국으로 오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훈련 중단을 내건 김여정의 담화는 일종의 역효과를 낸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이번에 치밀하게 움직였다고 보는 것은 저쪽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통신선 복원에서 강경조치 다짐으로 단기간 내에 메시지가 널을 뛰는 건 북한 나름의 조바심과 상부 정책 결정체제의 혼란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김여정·김영철 담화 공세, 지난해 6월처럼 파국으로 치달을 지가 관건
관건은 김여정·김영철의 담화 공세가 지난해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처럼 앞으로 '가속화의 과정'을 밟아 가느냐이다.
김여정 부부장은 이번 담화에서 미 바이든 정부의 '외교적 관여'와 '전제 조건 없는 대화' 방침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면서 국가방위력과 선제타격능력 강화, 즉 핵·미사일 능력의 강화 방침을 밝혔고,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은 남한을 향해 "엄청난 안보위기를 시시각각 느끼게 할 것"이라고 위협을 한 상황이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력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여정의 담화에 이어 김영철 통전부장이 후속 담화를 내고, 또 김여정 담화를 북한 주민들이 보는 노동신문에 공개하는 것을 보면 지난해 6월처럼 김여정 부부장 주도로 연락사무소 폭파에 이르는, 불안 불안한 '가속화 기제'가 이번에도 조금은 작동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 앞에 놓인 선택지…선제타격 능력 강화의 맥락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대응을 공언한 만큼, 북한이 언제 어떤 조치에 나설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 앞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 먼저 김여정 부부장이 언급한 '선제 타격 능력 강화'의 맥락이다. 선제 타격 능력은 미국에 대한 핵·미사일 능력을 의미하는 만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 초 8차 당 대회에서 제시한 다양한 전략무기 개발과 이에 따른 시험 발사를 말한다.
서울대 이정철 교수는 "북한은 미 바이든 정부가 과거 오바마 정부처럼 전략적 인내 정책을 쓰며 북미 핵협상에 나설 뜻이 없다고 보고 있다"며, "그렇다면 북한이 원하는 방식의 협상에 미국이 나올 때까지 단계적으로 긴장을 조성할 가능성이 높고, 지난 2017년의 긴장 고조 상황까지 갈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다만 바이든 정부의 성향으로 볼 때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한다고 해도 "핵 협상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북한은 그 길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 교수의 전망이다.
北이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한미연합훈련 사전훈련 개시일인 1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과 남조선군은 끝끝내 정세 불안정을 더욱 촉진시키는 합동군사연습을 개시했다"며 "남조선 당국자들의 배신적인 처사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김여정 부부장이 담화에서 한동안 언급하지 않던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다시 꺼내든 것도 의미심장하다.
중국의 대미, 대한반도 전략에 적극 부응하는 한편 향후 북미 핵협상에 대비한 '값 높이기' 차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중국과 공명함으로써 대미·대남 무력 도발이 가져올 국제사회의 파장을 줄일 수 있고, 코로나 19이후 식량 등 중국의 다양한 지원도 모색할 수 있다.
"주한미군 무기와 철수문제를 거론한 김여정의 담화에는 중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것이 한 북한 전문가의 진단이다.
北 내부전쟁으로 외부로 전선 확대 어려워…제한적 군사행동
물론 북한의 강도 높은 무력 도발을 제약하는 요소도 많다.
북한은 코로나19 비상방역과 대북제재에 8월 폭우 피해까지 겹쳐 심각한 '내구력 소진' 상황에 처해있다.
북한이 1년 6개월 이상 국경을 닫고 내부에서 사실상 전시체제를 가동하며 방역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전선을 외부로 확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게다가 북한이 밀착하는 중국도 선을 넘는 북한의 도발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국이 대한반도 전략에 따라 주한 미군철수를 강력히 요구하는 상황에서 선을 넘는 북한의 도발은 미국의 중단거리 미사일 추가 배치 등 한반도 전력 강화에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단거리 미사일 등 제한적 군사도발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은 최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시험발사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휴전선 일대에서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조치로 북한이 지난해 6월 언급한 군사행동을 실행할 수도 있다. 금강산관광지구·개성공업지구 병력배치, 9.19 군사합의로 철수한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재진출, 접경지역 군사훈련 재개 등이다. 김여정 부부장이 지난 3월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며 언급한 9.19 남북군사합의 파기선언, 금강산 관광지구 내 남측 시설 철거, 대남 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폐지 등도 선택지에 오른다. 북한은 물론 이런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황에 맞게 배합할 가능성도 있다.
한미 본 훈련 시작되는 16일 주목…문 대통령 8.15 경축사도 변수
3일 경기도 동두천시 주한미군 캠프 케이시에서 미군 차량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북한의 행동 시점으로는 한미연합훈련 본 훈련이 실시되는 16일 전후일 가능성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8.15경축사 내용도 변수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지난 2017년 8월 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급에 해당하는 화성12형을 시험 발사한 뒤 조선평화옹호전국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을지 프리덤 가디언 연습에 대응한 무력시위라고 밝힌 바 있고, 지난 2019년 8월 6일에 김정은 위원장 참관 하에 신형 단거리 발사체 발사시험을 한 뒤 "합동군사훈련에 대응하는 경고를 보내는 기회"라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이 지난해 6월 남한과의 관계를 대적관계로 규정하며 통신선을 끊은 지 1년이 넘어서야 남북관계의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연락채널이 어렵게 다시 복원됐고, 복원된 그 통신선마저 2주 만에 다시 끊겼다.
따라서 북한이 현 국면에서 새겨놓을 긴장의 파고가 깊을수록 향후 복원 과정의 어려움이 예상된다. 과거 미국 클린턴 정부 말기와 노무현 정부 말기에 북미와 남북의 극적인 합의로 만들어진 기회의 창이 결국 이후 정부 교체로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도 현 시점에서 환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