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6년 12월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2016년 12월 최순실 국정조사 특위 1차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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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 35억 원을 들여 정유라씨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누구든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는 형사책임도 포함되는 겁니다. ▷이재용 : 제가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면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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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무거움을 보여주는 짧지만 상징적인 장면. 대한민국 최대 기업 수장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국회 청문회장에서 뱉은 이 짧은 한 마디를 지금도 폭염의 구치소 안에서 스스로 증명해 가고 있다.
이 부회장의 '감방생활'은 2016년 말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연루되면서 시작됐다.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에게 86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지난 1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월의 실형이 확정된 뒤 고단한 수형 생활을 이어왔다.
하지만 8.15 가석방 대상자에 전격 포함되면서 이 부회장의 '감방생활'은 예정보다 일찍, 오는 13일 종지부를 찍게 됐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승인에 감방 문을 나서게 되는 이 부회장의 심정이 마냥 기쁠지는 모를 일이다. 국정농단 의혹 규명 과정에서 이 부회장의 뇌물 의혹을 가장 끈질기게 잡고 늘어졌던 장본인 중 하나가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박 장관이기 때문이다.
이한형 기자
2016년 1차 청문회 과정에서 이 부회장의 '형사책임' 발언을 이끌어 낸 장면 뿐 아니라, 박 장관은 청문회장과 언론을 가리지 않고 '촌철살인' 화법으로 이 부회장을 전방위 압박했다. 특검 기소로 진행된 1, 2심 재판에서 실형과 집행유예로 판결이 엇갈리자 각 재판부에 대해 내놓은 극단적인 평가가 대표적이다.
박 장관은 1심 재판부가 이 부회장에 대해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하자 "박근혜 정치와 이재용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는 재판부의 판단은 촛불민심에 투철했다는 느낌"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삼성과 이 부회장측이 중형 선고에 실망감을 나타내자 한 방송 인터뷰를 통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며 거칠게 비난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가 징역 5년의 원심을 파기하며 집행유예를 선고하자 "1명의 재판장이 1700만 촛불 국민에 견주다"라는 페이스북 글 한 줄로 선전포고에 나섰다. 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2심 판결을 보면 한 사람의 재판장 취향에 따라 이뤄진 널뛰기 재판에 주권이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며 항소심 재판부를 몰아부쳤다. 이 때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법원개혁 카드'까지 언급하며 대법원을 긴장시켰다.
이재용 부회장 국정농단 혐의 인정無…촛불정부 장관이 가석방 결정
박범계 법무부 장관. 이한형 기자
날마다 복잡한 현안을 다루고 결정해야 하는 정치인에게 과거의 입장을 무조건 견지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2016년 탄핵 국면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박범계와 2021년 문재인 정부의 법무 행정을 책임지는 장관 박범계는 입장이나 역할에서 많은 변화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벌써 2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사태와 이에 따른 경기침체, 불안정한 세계 반도체 시장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이 부회장을 마냥 가둬두는 것은 국익에 해롭다는 정무적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사면권 발동에 부담감을 느낀 대통령을 대신해 박 장관이 '총대를 멨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이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전에 반드시 유념해야할 금도가 있다. 입장을 바꾸게 된 배경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최대한 설득하는 과정이다. 억울할 수도 있지만 기존 입장을 번복한데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 할 수 있는 자세가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인의 '책임감'일 것이다.
아직까지 박 장관에게서 이런 설득과 설명의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다. 가장 손쉽게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었던 지난 9일 가석방 심사 결과 발표장에서는 장관과 기자간의 활발한 질의·응답 대신 '질의응답은 없다'는 싸늘한 사전 공지만 공허하게 울렸다. 퇴근길 '청와대와 사전 조율이 있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가석방은 법무부의 절차와 제도"라는 무성의한 답변만 돌아왔다.
황진환 기자과거 5년 실형 선고를 '촛불민심에 투철한 판결'이라며 추켜세웠던 '촛불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대한민국 전체 수형자 가운데 1% 미만만 누리는 특혜를 이 부회장에게 왜 허용해야 했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이 부회장 측은 특검 기소때부터 일관되게 최순실에 대한 금품제공은 강요에 의해 수동적으로 응한 것일 뿐, 대가성이 없어 무죄라는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박범계식 표현을 빌자면 현재까지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은 "정신을 못 차린" 상태라는 소리다.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 박범계 의원은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2조6천억여 원으로 추산되던 태안 기름 유출 피해와 관련해 삼성중공업의 배상 책임을 56억원으로 제한한 후보자의 판결을 지적하며
"한국 법정의 정의의 여신은 재벌이 만든 저울을 들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일갈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던진 일갈에 똑같이 답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재용 가석방이라는 결정을 내리게한 박 장관의 저울은 과연 누가 만든 저울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