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0일 오후 대구 중구 서문시장을 찾은 자리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권 유력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른바 '주120시간 노동' 논란으로 곤혹스런 처지에 몰렸다.
논란이 커지자 윤 전 총장이 "120시간씩 일을 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해명을 내놨지만, 해당 분야에 대한 '몰이해'만 다시 한 번 드러내고 말았다.
"주120시간 일하고 쉬어야" 비현실적 주장 그대로 옮긴 윤석열
먼저 문제가 된 발언은 지난 19일 매일경제와 인터뷰 도중 문재인 정부의 '주52시간 근무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해당 인터뷰 기사에 실린 관련 발언 전문을 옮기면 이렇다.
"현 정부는 주52시간제로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했지만 일자리 증가율이 (작년 중소기업 기준) 0.1%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실패한 정책이다.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52시간 제도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의 핵심인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윤 전 총장의 생각이 아니라 스타트업 청년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주120시간 노동의 비현실성, 더 나아가 황당함이 드러난다.
일주일에 120시간을 일하려면 주5일제로는 24시간을, 하루를 쉬면 나머지 6일 동안 20시간씩 일해야 한다. 휴일 없이 7일 내내 일하더라도 하루 17시간 넘는 중노동을 해야 120시간을 겨우 채울 수 있다.
윤 전 총장이 야권 유력 대선 주자 자격으로 임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처럼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주장을 그대로 전한 것만으로도 평소 노동 문제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OECD 4위 장시간 노동 국가인데…보수진영도 노동시간 단축엔 동의했어
애초 주52시간제의 성패를 논하기 전에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시간 노동 국가인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데에는 이미 보수와 진보를 넘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보고된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지난해 1908시간에 달했다. 노동시간이 보고된 43개 나라 중 콜롬비아, 멕시코, 코스타리카에 이은 4위로, OECD 회원국의 평균 노동시간인 1687시간보다 221시간이나 많은 수준이다.
그나마 주52시간제가 시행된 지난해가 기준이어서 개선된 결과로, 주52시간제를 도입하기 전인 2017년에는 연간 2024시간에 달해 멕시코에 이은 2위였다.
더구나 산업구조가 재편되고,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과 육아의 병행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면서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 때문에 보수 성향의 박근혜 정부조차 출범 직후 추진했던 노동개혁 5법 안에 '근로시간 단축'을 포함시켰고, 2017년 대선 당시에는 문 대통령 뿐 아니라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도 주52시간제를 공약으로 내걸었을 정도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0일 오후 대구 중구 서문시장 상인회 사무실에서 지역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52시간제 실패' 주장하며 내놓은 근거도 '자승자박'
윤 전 총장이 주52시간제는 실패한 정책이라며 제시했던 근거도 따져보면 헛점이 눈에 띈다.
애초 고용의 증감은 인구구조 변화나 경제 상황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지난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에 걸쳐 역대 최악의 고용위기가 펼쳐졌다. 다른 변수를 무시한 채 고용증가율이 저조했다는 이유만으로 주52시간제의 고용 증대 효과가 미미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윤 전 총장이 말한 통계만 살펴봐도 그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없는 주장인가 드러난다.
윤 전 총장이 인용한 수치는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최근 제시한 자료로 보이는데, 중견련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소기업은 각각 1.6%, 5.2%, 0.1%씩 일자리가 늘었다.
지난해에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주52시간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중견련 통계대로라면 대다수 사업장에 주52시간제가 적용되지 않았던 중소기업보다 이미 시행 중이었던 대기업, 중견기업의 일자리 증가율이 더 높았다는 얘기다. 윤 전 총장이 제시한 근거가 스스로 본인의 주장을 뒤엎은 '자승자박'인 셈이다.
尹, 해명 내놨지만…주52시간제 논란됐던 유연근무제 이해 못했나
이번 논란에 윤 전 총장은 20일 대구 서문시장 상인들과 간담회를 마친 뒤 기자들에게 "우리 근로자들을 120시간 일 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윤 전 총장은 "2주 전 청년 스타트업 행사에 갔다. 청년들이 게임을 개발할 때 주 52시간을 하니까 집중력이 떨어지니 주 52시간을 월 단위나 분기, 6개월 단위로 해서 평균적으로는 주 52시간을 해도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을 노사 간의 합의로 좀 변형할 수 있게 예외를 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해명 역시 윤 전 총장이 그동안 얼마나 노동 문제에 관심이 없었는가를 다시 한 번 드러냈을 뿐이다.
이미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일감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이후에 쉴 수 있도록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사업장 밖 근로시간제, 재량근로제, 보상휴가제 등 다양한 유연근무제가 보장되고 있고, 사용자와 노동자대표가 합의만 하면 시차출퇴근제, 집중근로시간제 등을 활용할 수도 있다.
특히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이 바로 윤 전 총장이 말한 일정 기간을 단위기간으로 삼아 단위기간 안에 평균 주52시간의 노동시간을 만족하도록 한 제도들이다.
더구나 정부는 주52시간제가 안착하도록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각각 6개월, 3개월로 확대하고, 경영상 사유로 돌발상황을 맞을 경우 특별연장근로까지 사용하도록 관련 법 개정 작업까지 마쳤다.
이 과정에서 유연근무제는 주52시간제에 관한 가장 '뜨거운 감자'로 주목받았던 이슈다. 하지만 윤 전 총장의 해명 발언은 '유연근무제로 사실상 장시간 노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노동계의 우려는 차치하더라도, '연장근로 단위기간을 연단위까지 늘려달라'는 경영계의 요구사항조차 반영하지 못한 수준이다.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김성희 소장은 "법을 다뤘던 사람이 근로기준법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없다"며 "노동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몰이해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더구나 유연근무제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기준이 있는데 1주 120시간씩 일해야 한다는 발언은 너무나 구시대적인 발상"이라며 "현재의 노동 문제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해야 할 것 같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