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박범계가 더 좁힌 '취재차단'의 길…그 끝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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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장관 14일 브리핑에서 피의사실 공표 차단에 방점
일반 사건 아닌 권력형 비리 사건에 대한 취재 제한 논란
박 장관이 주도적으로 통과시킨 박근혜 특검법은 '사건의 대국민 보고권' 명시
박근혜 사건 피의 사실 공표는 선, 문재인 정부 사건 피의 사실 공표는 악?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14일 경기도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피의사실 공표 방지 방안 등을 포함한 검찰 수사관행 개선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14일 경기도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피의사실 공표 방지 방안 등을 포함한 검찰 수사관행 개선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최근 문재인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글 속에서 "선의로 포장된 길은 지옥으로 통한다"는 경구의 등장이 부쩍 잦아졌다.
 
자유주의 경제철학을 대표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Hayek)의 저서 '노예로의 길'에서 등장하는 문장이다.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외부의 힘으로 창조된공적 질서(계획경제)와 스스로 형성된 자생적 질서(시장경제)를 구분한다. 이어 "자생적 질서를 인공적 질서로 전환시키려는 모든 정치적 기도(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시장간섭)는 결국 노예의 길로 가는 이데올로기이며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은 결국 지옥으로 간다"고 일갈했다.
 
조금만 세상 경험을 해본 이들이라면 굳이 경제철학자의 과격한 이론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선의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선의가 정작 아이들을 빗나가게 하고, 사랑하는 연인들이라 하더라도 일방의 상대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파국을 불러오기도 한다.
 
14일 '한명숙 모해위증 사건 합동감찰 브리핑'을 진행한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목소리에서도 자신의 선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느껴졌다. 이날 브리핑은 '한명숙 모해위증 사건 합동감찰'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였음에도 한명숙 수사팀이 수사과정에서 어떤 부적절한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팩트' 제시는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브리핑의 주된 내용은 검찰 수사 내용의 외부 유출, 특히 언론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 방지책에 방점이 찍혔다.
 
박 장관은 브리핑 모두 발언에서 "악의적 수사상황 유출행위는 반드시 찾아내 엄단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보관이 아닌 사람이 수사의 초·중기에 / 수사의 본질적 내용을 / 수사동력 확보를 위해 여론몰이식으로 흘리는 행위'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법무부 배포 자료에서 '/'기호를 사용했기에 원문을 그대로 재현한다. 강조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형사사건 공개금지 규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이 모든 대책은 "알권리를 충실히 보장하고 동시에 인권침해나 무죄추정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하려는 선의 때문이다.
 
인권을 보호하자는 데에 어깃장을 걸수야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박 장관이 주장하는 인권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대중 다수의 인권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이날 박 장관이 제시한 '악의적 수사정보 유출'의 세가지 사례가 '한명숙 모해위증 사건', '김학의 불법출금 사건'. '울산 원전 자료 조작 사건'이다. 세 사건 모두 '권력형 범죄'의 전형이기도 하다.
 
언론들이 이들 사건 취재에 열을 올린 것은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가 언론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물론 언론이 권력 감시의 역할을 수행한다 해서 불법적 행위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박범계 장관이 지적한 '피의사실 공표' 문제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해묵은 딜레마 중 하나다. '피의사실 공표'가 어려운 이유는 언론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디까지가 언론 의무의 영역인지, 아니면 피해야 하는 인권 보호의 영역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 일반화 시키기에 너무나도 다양한 유형과 모호성이 기자들의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의혹의 대상자가 일국의 총리나 장관급의 권력자들이라면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권력 스스로가 이 모호함의 경계선을 긋는 주체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법무부는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서 언론 요청 등에 의해 공개돼야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형사사건공개심의위원회를 거쳐 공개 여부를 판단토록 하는 '게이트키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규례 개정안은 공개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을 더 엄격하게 만들어 정보 공개의 관문을 대폭 좁혀버렸다.
 
박 장관이 앞서 언급한 "악의적 수사상황 유출행위" 가운데 무엇이 '악의적'인지 법무부가 '엄격하게'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국정감사에서 피감기관이 국회의원들에게 감사 분야를 지정해 주는 모양새나 다름없다. 법무부는 공개심의위원회가 각 지방검찰청이 독자적으로 조직하기 때문에 법무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검찰의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수사심의위와 달리, 수사 도중의 모호한 상황에서 공개심의위원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정보 공개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지난 2016년 '사건의 대국민 보고권'을 명시한 '최순실 특검법안을 주도적으로 통과시킨 당사자가 박범계 장관이다. 특검법은 "국민적 의혹사건의 수사진행상황을 공표할 수 없게 하는 것은 특별검사의 수사 공정성을 국민이 알 수 없게 하는 것이므로 타당하지 않다"며 특검이 의혹 사건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해 공개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만약 언론 공개 여부를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가 결정하도록 했다면 박근혜 정부 퇴진 양상은 역사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날 법무부는 "공보관을 통한 (수사정보) 공개 확대로 언론의 특종 보도를 위한 경쟁 방지 효과"가 있다는 내용의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 개정방안 요지'라는 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대범함'도 보여줬다. 박근혜 특검 당시 수많은 매체들의 특종 경쟁이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을 이끌어 갔던 기억은 박 장관의 뇌리 속에서 이제 사라진 듯 하다. 국가와 검찰 권력의 폭주를 감시하기 위한 매체간 특종경쟁을 제거돼야 할 구습정도로 치부하는 정치권력의 오만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박범계 장관의 '인권수호'라는 선의로 포장된 길을 걸어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제 그 길의 끝이 지옥이 아니기만을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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