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
형법 제53조 '작량감경' 규정은 판사에게 유기징역 형기를 반 토막 낼 수 있는 재량권을 보장한다. 원칙적으론 실형을 벗어날 수 없는 피고인들까지 집행유예로 풀어줄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다. '솜방망이 처벌', '유전집유 무전실형', '복불복 판결' 등 국민청원에 올라오는 단골 비판들의 밑바닥에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지난 2019년 서울중앙지법 1심 형사사건 중 형법 제53조가 적용된 판결 925건(피고인 1020명)을 모두 분석했다. 작량감경은 얼마나 빈번하게 사용됐는지, 작량감경이 적용되는 합당한 기준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기준이 존재한다면 '국민들이 공감하는 정의'에 부합하는지 면밀히 살펴봤다. [편집자 주]2007년부터 2019년까지 최근 13년간 서울중앙지법 형사부에서 유죄 판결한 사건은 모두 86183건. 이중 작량감경이 적용된 사건은 13234건(15.4%)이다.
이중 합의부 사건, 그러니까 죄명 상 법정형이 징역 혹은 금고 1년 이상의 하한이 설정된 중범죄 사건으로 대상을 좁혀보면 비중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같은 기간 중앙지법 합의부 사건 중 11207건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나왔는데 이중 약
53.2%에 해당하는 5958건에 작량감경이 쓰였다.
쉽게 말해 최근 13년 동안 중앙지법에서 유죄가 인정된 중범죄 사건 중 절반 이상이 작량감경된 셈이다.
◇10년 넘게 중범죄 50% 형이 반토막…당연해진 작량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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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로 봐도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매해 합의부(중범죄) 사건 중 작량감경 적용 판결 비중은 50% 안팎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9년 58.9%를 기록한 후 다소 낮아지는 추세가 일정 구간에서 관측되지만 이후 다시 오르는 등 명확한 감소세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단독 사건까지 합친 전체 유죄 판결로 보아도 추세는 비슷하다. 2013년 19.1%로 관측 범위 중 최고치를 기록한 후 잠시 낮아져 2016년 10.7%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는 모습이다.
작량감경은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만한 사유가 있을 때 판사가 재량으로 형을 낮추도록 한 법 조항이다. 이미 심신미약 등 법률상 감경 사유들이 규정돼있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형을 낮춰야 할 경우에 쓰이는 제한적인 감경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판사의 당연한 권한이라기보다는 법적인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작량감경이지만 현실 법정에서는 당연하고 또 꾸준하게 쓰이는 형국이다.
◇작량감경 어디에 쓰이나 보니…음주운전·성범죄 그리고 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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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작량감경을 판사들은 주로 어떤 범죄에 사용하고 있을까. 2019년 서울중앙지법 1심 형사판결 중 작량감경이 적용된 판결 925건(피고인 1020명)에 기재된 범행은 모두 1651건인데 이중 단독 사건에서는 음주운전 등 교통범죄가 951건 중 626건(69.5%) 합의부 사건(중범죄)에서는 성범죄가 736건 중 238건(32.3%)으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피고인 1명이 여러 범행을 저지른 경우도 있어 범죄 유형을 살피기 위해 범행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둘 모두 최근 몇 년 동안 여론의 공분을 산 사건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범죄 유형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운전자의 음주운전 혹은 과속운전으로 사망한 고(故) 윤창호씨·고(故)김민식 군의 안타까운 사고나 반대로 조두순·조주빈과 같이 사회를 분노하게 한 성범죄 등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국회에서는 엄벌을 목표로 관련 법의 형을 높이는 작업이 대폭 이뤄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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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범주로 묶어보면 작량감경이 적용된 범행이 주로 '특별법'을 위반한 사안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분석 대상 범행 1651건 중 1163건(70.4%)이 특별법 상 죄를 위반한 범행으로 일반법(형법)상 죄를 위반한 범행(488건)의 두 배 이상이다. 이중 상대적으로 형이 가벼운 단독 사건만 보면 915건 중 735건(80.3%)에 달한다.
특별법은 특정의 사람·사물·행위·지역 등에 국한해 적용되는 법률로 일반법(형법)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특정 영역의 사회문제에 입법이 필요하다는 여론의 압력이 점점 높아지는 데다 일반법보다 비교적 신속하게 법을 만들거나 고칠 수 있어 국회의 입법 활동도 주로 이 특별법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결국 분석 결과를 종합하면 법을 만드는 입법부(국회)에서 사회적 요구에 따라 특별법 제·개정을 통해 처벌 수위를 높여도 법을 적용하는 사법부(법원)는 정작 다시 '작량감경'으로 이를 낮추는 모양새가 최소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무리 법이 바뀌어도 이러한 범죄들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만 반복된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왜 판사들은 작량감경을 광범위하게, 그것도 최근 국회가 만들거나 고친 사회적으로 민감한 범죄들에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국회의 특별법 남발, 법 체계 흔들려 작량감경 불가피"…법원의 호소법원 내부에선 '작량감경을 쓸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원인은 국회에 있다'는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국회가 여론에 따라 기존 법 체계와 맞지 않는 수준으로 형을 대폭 올리는 특별법을 쏟아내니 법원으로서는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작량감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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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같은 경우가 판사들이 작량감경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A에게 적용된 죄는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상 절도죄. 이 죄명이 적용된 이상 법에서 규정된 형을 따를 경우 아무리 낮아도 3년 이상이 선고돼야 한다. 법률상 감경 요인인 심신미약까지 고려해도 최소 1년 6개월 이상이다.
하지만 △사물 판별 능력이 떨어지고 78세의 고령인데다 △25만원 상당의 옷을 훔쳤다가 이마저도 돌려준 점을 고려하면 1년 6개월의 형은 너무 가혹할 수 있는 만큼 작량감경이 필요하다는 것이 판사들의 주장이다. 같은 범행에 대해 일반 형법의 절도죄(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가 적용됐다면 벌금형도 가능할 수 있는 사안인데 형평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범죄를 두고 처벌 수위가 서로 다른 법이 존재하는 문제를 비롯해 법과 법 사이의 질서를 고려해야 하는데 국회는 법만 쏟아낸 채 해결은 판사의 재량 판단에만 의지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졸속 입법이 사실상 작량감경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법정형 하한을 한참 올려 오는 법에 대해 국회는 '작량감경이라는 견제수단이 있으니 괜찮지 않냐'고 하는 식이다. 사실상 법이 법률상 감경을 쓰고 작량감경까지 또 사용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라며 "작량감경 조항이 없는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형만 높이는 입법을 했다면 상당수의 법이 위헌에 해당할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작량감경의 사용을 줄이려면 국회가 매우 신중한 숙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빨리 국민의 이목을 끌 결과물을 내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형법보다 만들거나 고치기 쉬운 특별법 발의만 쏟아진다는 지적도 있다. 이렇게 고민 없이 강도 높은 처벌을 목표로 생겨난 법들이 기존 법 체계를 흔들 뿐 아니라 정작 실제 범죄를 줄이지 못해 다시 또 형을 올리는 입법이 반복된다고도 말한다.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는 "특별법의 양형이 왜 계속 올라가겠냐. 온 국민의 분노가 향하는 상황에 국회의원들 입장에선 가장 값싸고 손쉬운 해결책을 쓰는 것"이라며 "법정형 하한만 높이는 졸속 처방을 하다 보니 근본 원인은 사리지지 않고, 다시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 하한을 올리는 회전문 같은 결과만 나오게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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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연구발표에서의 언급과 같이 특별법을 상대적으로 손쉬운 방법으로 택하는 입법 활동에 대한 비판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사실상 같은 죄인데 특별법이 형법보다 법정형이 높은 경우 위헌 소지가 다분하고 그때마다 판사들이 골머리를 앓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같은 행위에 대해 형법보다 형량만 더 센 특별법에 대해 위헌 판단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지난 2015년 형법상 처벌이 가능한 폭행·협박·재물손괴에 대해 형량만 더 센 특별법을 둬 처벌하는 것에 대한 헌재의 위헌 결정이 대표적인 예다.
작량감경을 남용하는 문제에 대한 법원의 항변이 결국 '일반법과의 균형을 위해서'로 요약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량감경 문제에 대한 책임 소지가 국회에도 있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작량감경으로 낮추니 형 계속 올릴 수밖에"…입법부의 반박
하지만 국회에서는 같은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정반대로 보고 있다. 판사들이 현재 형성하고 있는 형에 대한 기준이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돼있어 이를 고려해 법을 새롭게 만들면 판사가 도리어 다시 형을 낮추고 있어 처벌 수위를 또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판사 출신인 B의원은 "거꾸로 보면 판사들이 자꾸 작량감경으로 낮추니까 계속 형을 올릴 수밖에 없다"며 "문제의 본질은 뭐냐면 판사들이 결국 형평성, 즉 유사한 사건에서 다른 판사들이 어떻게 선고를 해왔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데 그것은 판사들이 형성한 것이지 국민이 형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아동학대 사건, 성폭력 사건의 형량 수준이 너무 낮다. 전반적으로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주권자로서 이를 제도화시키는 방법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법을 제정하는 것이니 형량을 국회에서 정하는 것"이라며 "형을 더 높이고 싶은 의사를 법에 반영할 주권자로서의 권한이 있는데 (작량감경으로 입법 취지를 무력화하는 것은)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국회가 형의 하한선을 고려하지 않고 법을 만든다는 것은 판사가 갖는 일종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또다른 판사 출신 C 의원은 "국회에서 입법을 할 때 보면 다른 범죄와 균형을 맞춰서 하게 된다"며 "특별법 역시 하한을 정할 때 마구잡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종류의 범죄들을 고려하고 이를 다시 입법조사처에서 조사한다. 국회의원이 발의했다고 그대로 통과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국회는 끊임없이 형을 올리고 법원이 이를 낮추는 악순환을 끊는 출발점은 사법부가 국민의 대표인 입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B의원은 "판사들이 국회에서 정한 법정형을 존중하며 작량감경을 줄인 경우에 형이 가혹하다고 한다면 그 의견을 다시 국회에서 참고해 형을 조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별법으로 형을 높이는 입법부 그리고 작량감경으로 다시 낮추는 사법부 간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식의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댈 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대법원 산하에 있는 양형위원회를 국회와의 중간 영역으로 옮겨 상호 견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