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용산구 아랫마을에서 만난 이충연(48)씨. '용산 토박이'인 그는 2009년 1월 '용산 참사' 당시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을 지냈다. 다소 마른 체구에도 단단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던 그는 언론이 만든 '화염병 테러리스트'의 이미지가 싫다고 했다. 이은지 기자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소년이 온다>(2014), 한강 中- '시간이 약(藥)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기억도 세월이 지나면 변형되고, 심지어 미화(美化)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통용되는 이 명제에도 엄연히 예외는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한평생을 일궈온 삶의 터전을 찰나에 잃게 된 철거민들이 외쳤던 소박한 슬로건은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힘없이 스러졌다.
2009년 1월 20일. 아버지(故 이상림씨)와 함께 용산 남일당 망루 위에 올랐던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강대로변이었는데 강바람이 엄청 세요. 1월 19일에 올라가 (이튿날) 동트기 전이 되니 영하 20도쯤 됐던 거 같아요. 물을 뿌리면 얼어버릴 정도의 날씨였는데 갑자기 새벽에 사이렌 소리 같은 게 울리면서 물대포를 사방에서 쏘고 진압을 시작하더라고요. 너무 추워서 불을 쬐면서 옥상에 앉아있었는데 (물이) 날아오니 그걸 피하느라고 혼비백산하고…진짜 지옥 같았죠." 아버지는 결국 이씨와 함께 그 '지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화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용산4구역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대하며 세입자들이 농성을 벌인 망루는 화재로 무너져 내렸다. 철거민 5명과 진압작전에 투입된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숨졌다. 나라는 발화 원인조차 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참사의 책임을 철거민들에게만 물었다. 내부에 인화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무력 진압을 강행한 경찰은 '무혐의'로, 이씨를 비롯한 철거민 20명과 용역업체 직원 7명은 기소로 결론이 났다. 2010년 11월 대법은 철거민들에게 징역 4~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고, 이씨는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에서 각각 2년씩 4년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 3월 31일, 이씨는 12년 전 그날로 '강제 소환' 당했다. 재·보궐선거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 참사 당시 서울시의 수장이었던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재개발 과정에서 전국철거민연합회라는 시민단체가 가세해 매우 폭력적 형태의 저항이 있었다"며 원인을 철거민 측에 전가한 것이다. 그는 "쇠구슬인가, 돌멩인가를 쏘며 저항하고 건물을 점거했는데, 거기에 경찰이 진압하다 생겼던 참사다. 그것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정의했다. 분노한 유가족들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사퇴하라"고 촉구했지만, 오 후보는 10여 년 만에 다시 시장으로 당선됐다.
"다시 12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씨를 지난달 23일 용산구 '아랫마을'에서 만났다. 홈리스행동과 빈곤사회연대,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이 함께 둥지를 튼 공간에서 만난 이씨의 얼굴은 의연했다. 그는 지난 2014년 11월 아내 정영신씨와 남영동에 열었던 호프집 '레아(Rhea)'를 코로나19 여파로 지난해 7월 정리했다고 했다.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의 단체들이 십시일반 모여 꾸린 '아랫마을' 1층에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흔적들이 빼곡이 남아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이충연씨는 "출소 이후 전국을 다니면서 저희처럼 억울하고 소외된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며 "어떤 현장에선 한 철거민이 옆에 오더니 '용산 (참사) 이후로는 그래도 용역들이 때리진 않는다'며 고맙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은지 기자
-오 시장의 관훈토론 당시 '문제 발언'을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저희는 어찌 됐건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거다. 오세훈이 (참사) 이후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진압 책임자였던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지금 경주에서 국회의원(국민의힘 소속)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경찰 내부인사 중 가장 측근으로 생각했던 인물이다. 경주에 가서 낙선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경주 분들은 그 사람이 용산 참사의 진압을 책임졌고, 그렇게 위험한 진압으로 부하까지 죽게 만든 사람이란 걸 모르더라.
사실 (그 발언 전에는) 누가 되든지 선거에 관심이 없었다. 오세훈이 그 이야기를 안했다면 아예 투표를 안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본인의 죄를 남한테 뒤집어씌우려 하고 저희를 찾아왔었다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는데…부모를 죽인 사람이 TV에서 나와 웃으면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면 (누구라도) 피가 거꾸로 솟을 거다. 너무 화가 났고 절대 '오세훈만은 안 된다' 하는 마음이었다. 오세훈이 시장이 됐다 해도 그를 시장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씨의 '끓는점'을 또 건드린 것은 오 시장이 이번 선거과정에서 이야기한 개발정책이 2009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지난 임기에서 '한강 르네상스' 사업을 내세우며 용산을 '단군 이래 최대 개발지역'으로 삼으려던 오 시장은 △재개발·재건축 규제 완화 △민간공급 활성화를 앞세웠다. 그는 "취임 후 일주일 안에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풀겠다"며 표심을 공략했고, 강남3구는 그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줬다. 오 시장이 쏘아올린 '재개발 기대심리'는 시세로 연결돼 강남과 목동, 여의도 등에서 재건축 아파트값이 2~3억씩 뛰기도 했다.
이에 놀란 서울시는 지난달 21일 압구정·여의도·목동·성수 등 4곳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하고, 추후 추가지정을 검토하겠다며 뒤늦게 속도 조절에 나섰다.
-오 시장이 내건 '개발 공약'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민간개발은 민간이 추진하고 개인한테 (책임을) 맡겨놓는 거잖나. 그럼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사업이 돌아가고, 실질적으로 세입자들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 않을 거고, 지주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가져가기 위해 개발이 진행될 거란 건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오세훈은 정책적인 '규제 완화'를 서슴없이 말했고, 그 개발정책이 바로 제가 살았던 용산4구역의 모습이다.
지금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은 하나도 없다. 관리비만 (월) 80~100만 원이 나온다고 하더라. 오세훈이 말하는 부동산 정책은 정말 '가진 자'들만을 위한 정책이다. 강남 아파트는 '80억'이란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상식적으로 그 돈을 벌어 자식을 키우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대다수 사람들이 '집값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면서 왜 오세훈을 지지하는지는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여기엔 조금만 집값이 떨어질 거 같으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지난 2014년 11월 이충연씨가 용산구 남영동에 수제맥줏집 '레아'(Rhea)를 오픈했을 당시 아내 정영신씨와 함께. 그는 참사 이후 가게를 다시 열 때에도 전국적으로 많은 연대의 손길들이 있었다고 돌이켰다. 그는 "우리가 제대로 싸웠다면 지금의 2030 세대들에게 '부동산 문제' 등을 그대로 떠넘기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았을 텐데, 하는 미안함이 있다"고 했다. 이충연씨 제공
용산에서 초·중·고를 내리 나온 이씨는 참사 이후에도 용산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남영동에 산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님이 30년 가까이 하셨던 고깃집 2층집에 살았다. "제게는 삶의 모든 기억들이 있는 곳이고 누구나 어렸을 때 기억하는 모습들이 있는 특별한 곳이었어요."
고층 빌딩이 빽빽이 들어선 용산 일대는 그가 한번도 꿈꿔본 적 없던 풍경이다. 이같은 '상전벽해'는 개발 광풍을 부추긴 이명박 정권의 몫이 크다고 했다. '4대강 사업' 등으로 전 국토를 개발권에 넣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토건주의는 오세훈의 시장 당선과 함께 정점에 올랐었다는 게 이씨의 평가다. 그는 "개발시점이 되면 용역들이 상주하게 되는데 보통 사업시행 기간이 3년이라 하면 저희 같은 경우는 1년이었다"며 "다른 지역보다 세배 가까이 빨리 진행한 건데 그만큼 폭력적으로 밀어붙였단 거다"라고 말했다.
"(용역이) 길에서 다짜고짜 말도 없이 때리고 40~50명이 모여 길을 막은 적도 있어요. 경찰에 신고해도 30분 넘게 일부러 안 오고…그러니 사람들이 거기서 어떻게 살겠어요? (당시 개발을) 맡았던 게 삼성물산인데 용역들이 철거가 하루 밀릴 때마다 (재개발)조합과 삼성에 500만 원씩 갚기로 약정이 돼있었어요."
망루에 오른 것은 '대화'를 향한 간절한 최후의 몸짓이었다. 이씨는 "망루를 지으니 경찰들이 주변을 다 둘러싸서, 나가면 잡혀갈 거 같으니 못 나갔었던 것"이라며 "(요구사항은) '대화하자. 일단 경찰들을 철수시켜라'(였다)"고 말했다.
"큰 걸 요구했던 게 아니에요. 사실은 '임대상가'를 요구하고 싶었지만 제도도 없고 해서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차선책으로 지역주민들과 논의한 게 임시부지였어요. 조경공사는 마지막에 하다 보니 개발이 이뤄지는 동안 그 빈 공터에 임시로라도 포장을 치고 몇 년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거예요. 당장 우리를 내쫓으면서 책정했던 걸(금액)로는 요 근처나 어디 가서 장사하기 너무 힘드니까…그런 얘기조차 (구청이나 서울시에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2018)에서 "저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죠. 그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데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어요?"라고 반문했던 이씨처럼 참사 유가족들은 그날의 자장(磁場)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진상 규명도, 당일 진압을 지휘한 '윗선'에 대한 처벌도 미완이라는 점이다. 영화가 조명했던 철거민들의 내분(內紛)과 죄책감은 관리자인 국가가 책임을 회피한 결과다. 지난 2018년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경찰 지휘부의 진압 결정이 본 사건에서 다수의 인명피해를 야기한 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사과를 권고했다. 이씨는 검·경이 다시 사건을 들여다본 형태가 '수사'가 아닌 '(재)조사'에 그친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 당시에 책임자들은 소환을 요구해도 다 거부했어요. 당초 조사자료가 부실해 책임자 등을 소환해 물어보는 게 다였을 텐데…그럼 어떻게 조사나마 제대로 이뤄졌겠냐는 거죠. 강제로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해요. 당시 정권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해 기소를 할 수는 없잖아요. 국가 공권력에 의한 폭력행위는 특별법을 만들어서 관련사안에 대해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해요. '그때 그 사람들'이 계속 승승장구하고 영전하면 사람들이 그걸 죄라고 생각하겠어요? 잘못된 시그널을 주는 거죠."
'용산 참사' 이듬해 오세훈 시장 당시 서울시가 펴낸 백서.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실 제공
책임 소재도 제대로 가리지 못한 사회적 참사는 온전한 추모와 재발방지를 기대하기 어렵다. CBS노컷뉴스가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오 시장 재임 당시 '용산 참사' 백서는 서울시의 인식이 오 시장과 궤를 같이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참사 이듬해인 2010년 12월 발간된 해당 백서의 제목은 '용산사고 345일간의 이야기-사고발생부터 협상타결까지 서울시의 노력'이다. 이 사건을 '예기치 못한 사고'(21쪽)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반영된 것이다.
발간사에서 오 시장은 "사고 당일 대책본부를 설치한 서울시는 이후 약 1년 동안 유가족의 권한을 위임받은 범대위 측과 조합 간의 중재자로서 수백 차례에 가까운 대화를 시도하는 등 원만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자평했다. 철거민들의 농성에 대해서는 "시위하는 과정에서 화염병과 골프공을 던져 일부 인근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고, 도로를 운행하는 승합차의 유리창을 파손하는 등의 피해를 야기했다. 차량통행이 많은 한강로 8차선 도로의 통제로 용산 일대는 물론 도심지역에 극심한 교통장애를 야기했다"고 적었다.
이씨는 "오 시장이 지시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걸 본 사람은 거의 없고, 만들었다는 것 자체도 알지 못했다"고 선을 그었다. "만들었다 해도 참사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본인이 숨기기 위한 치부를 미화시키기 위한 뉘앙스로 만들었을 거라고 유추할 수밖에 없어요. 이번 선거에서도 '(참사 당시) 조문했다'고 하는데 유족들은 협상 진행이 안돼서 355일 동안 장례식장에 있었거든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고, 서울시는 철저히 외면했어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등이 만든 반(反)빈곤운동 및 홈리스 야학공간 '아랫마을' 입구. 이은지 기자
아울러 참사 '이후'가 '이전'과 달라지지 않는 이상 그때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씨는 "지금까지도 정신과 진료를 받으시는 분들이 많다. 1월달이 가까워오면 잠도 잘 못 자고, 오 시장의 발언 같은 일이 생기면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는다"고 토로했다. 징역형을 선고받고 출소한 뒤 지난 2019년 6월 극단적 선택을 한 동료 김모(49)씨를 떠올리며 "90 가까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분인데 정말 돌아가실 분이 아니었다. 저희도 마음에 있는 이야길 잘 못하고 살지만, 그 이후 가끔씩 서로 전화하게 된다"고도 했다.
"제노사이드(genocide)나 해외사례를 봐도 '치료를 받으라'고 해서 치료가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진실이 드러나서 책임자가 처벌을 받고, 사회가 잘못됐다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 뭔가가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치유가 되는 거죠. 재개발 지역에선 최소한 임대상가 정책 같은 게 만들어져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씨는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조사단이 꾸려지길 원했는데 그런 것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정권 말기지만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의미에서 용산 참사의 진상규명이 왜 필요한지 알리고 조사단이 꾸려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저희의 바람"이라며 "모두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주거정책을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