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난민신청서 보지도 않고 '불허'"…이례적 무효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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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재신청자에 하루 만에 '불허' 처분
졸속심사 장려…법무부 미봉책 원인 지적
문제의 지침, 난민법에 도입…인권단체 반발
※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2020.9.10. 서울행정법원 '체류기간 연장 등 불허가처분 취소' 소송 판결문
"난민인정신청서만 살펴보더라도 원고가 박해 경험이나 이란 정부의 주목 가능성에 관해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고(서울출입국·외국인청장)는 그러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출입국관리정보시스템에 요약 기재된 사유만 확인하고서 '사정변경 없는 난민 재신청자'에 해당한다고 보고 원고의 체류자격변경을 불허했습니다."

연합뉴스
본국에서의 박해와 전쟁 등으로부터 어렵게 탈출해 도착한 나라에서 난민 신청을 했는데, 딱 하루 만에 '불허' 당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부끄럽게도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법원은 법무부 산하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의 그러한 처분에 대해 위법성과 하자를 인정하며 '취소'를 넘어 아예 '무효'라고 판결 했습니다.(행정소송에서 처분행위의 '무효'는 쉽게 인정되지 않을뿐더러 난민에 대한 처분과 관련해선 사실상 처음인 듯합니다.) 난민 인정 절차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란 출신인 A씨는 1993년 한국에 처음 입국해 지내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이후 종교 문제로 본국에 돌아가기 어려워지자 2003년 첫 번째 난민인정신청을 했는데 약 3년간의 심사 끝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란 정부가 A씨의 개종 사실을 알고 박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2009년 이란으로 돌아간 A씨는 10년 후인 지난해 1월 단기방문(C-3) 체류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입국해 4월 10일 난민인정신청을 했습니다. 다음날인 11일에는 난민신청자들이 인정받는 기타(G-1) 체류자격으로 변경을 신청했는데, 그 당일에 바로 불허 처분이 나왔습니다. '사정변경 없는 재신청자여서 불허함'이라는 한줄 사유가 전부였습니다.

이같은 결정이 가능했던 배경엔 법무부의 '난민인정 심사·처우·체류 지침'이 있었습니다. 법무부의 비공개 내규에 불과한 해당 지침에서 '사정변경 없는 재신청자'에 대해서는 보다 빠르고 선제적으로 난민 심사에서 탈락시키도록 실무자들에게 허락한 겁니다.

최근 5년간 한국에 난민신청자가 약 10배 늘어난 데 비해 심사 인력이나 여건은 그에 맞게 개선되지 않으면서 법무부가 내놓은 미봉책이었습니다. 난민 심사 시스템 전반을 돌아보고 확충하는 대신, 각종 요건들을 마련해 난민 심사 대상을 예전처럼 줄이려는 것이었죠.

대놓고 졸속심사를 할 수는 없으니 법무부가 내세운 명분은 난민 재신청자에 대해선 '중대한 사정변경이 있는지 여부'를 먼저 따져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역시나 '졸속심사'였습니다.


A씨의 난민담당자는 신청서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A씨가 이전과 같은 종교 문제로 난민신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출입국관리시스템에 '동일사유 재신청, 기독교로 개종'이라고 적었습니다. 체류업무담당자는 이 한줄짜리 기재내용만 보고 '사정변경 없는 난민 재신청자'라고 적어 A씨의 체류자격을 불허했습니다.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2020.9.10. 서울행정법원 '체류기간 연장 등 불허가처분 취소' 소송 판결문
"피고(서울출입국·외국인청장)의 불허 처분으로 달성하려는 공익과 그로써 처분 상대방이 입게 되는 불이익의 내용과 정도를 비교형량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처분은 피고가 행정청으로서의 기본적인 사실조사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은 채 이뤄졌고 체류자격 변경허가에 있어 출입국관리법이 피고에게 폭넓은 재량을 부여한 취지를 몰각해 재량권을 불행사한 경우에 해당해 그 하자가 중대하고 외형상으로도 명백합니다."

A씨의 2차 난민인정신청 사유도 1차 신청 당시와 같은 종교문제였지만, 10년 사이 본국에서의 상황은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란에 돌아간 후 A씨의 주변 사람들이 개종 관련 증거를 경찰에 제출해 체포·구금되기까지 한 겁니다. A씨는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고, 이러한 점을 자세히 신청서에 적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박해 받을 가능성이 10년 전에 비해 매우 분명해진 것이죠.

연합뉴스
법원은 A씨가 10년 만에 재입국해 난민인정신청을 한 만큼 중대한 사정변경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도 별도로 조사조차 하지 않은 점을 꾸짖었습니다. 또 해당 불허 처분으로 달성하려는 공익과 A씨가 입게 될 불이익을 비교형량할만한 충분한 시간은커녕 체류업무담당자에게 관련 자료조차 제공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A씨의 사건은 다행히 난민인권단체의 도움과 법원의 이례적인 '무효' 판단으로 잘 해결됐지만, 이같은 황당한 사건이 앞으로 더 많아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법무부가 문제의 '재신청자 부적격' 규정을 아예 난민법에 도입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28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난민법 일부개정안에는 '과거 난민인정 신청에 대해 부적격 결정 또는 난민불인정 결정을 받은 사람이 재신청한 경우'에 원칙적으로 난민 인정 심사 부적격 결정을 하도록 하는 조항이 신설됐습니다. 예외적으로 재신청자가 중대한 사정변경이 있다는 사실을 소명한 경우에만 부적격 판정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명백히 이유 없는 신청'일 때엔 일반 난민신청과 동일한 심사·불복 절차를 보장하지 않고 난민불인정결정을 하도록 간소화 절차도 마련했습니다. 법무부가 인정하지 못하는 난민 신청 사유란 체류연장 목적·사인간의 분쟁·경제적인 이유 등입니다.

2020.12.28. 난민인권네트워크 32개 단체 공동성명
"이번 개정안은 대부분의 난민신청자를 남용적인 신청자로 낙인찍고 거부해온 기존의 행정관행에 법적근거를 마련해준 겁니다. '재신청'한 난민들은 서류로만 심사해서 원칙적으로 기각하겠다는 것이고, 법무부가 잘못 이해한 기준에 따라 거부해온 대부분의 난민신청에 대해서도 '명백히 이유 없다'고 낙인찍고 빨리 추방하겠다는 겁니다."

"체류연장 목적, 경제적인 이유, 사인 간의 분쟁 등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은 난민과 난민이 아닌 사람을 구분할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핵심은 '박해의 위험이 있는지'입니다. 한국 정부는 해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떤 박해의 위험이 있는지를 판단할 체계적인 정보와 자료, 심사역량이 없다 보니 난민신청자 개인을 의심하는 식으로 심사하고 있습니다."

법무부는 "체류연장 방편으로 난민제도를 남용하는 사례를 막겠다"며 이번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난민 신청자들과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느끼는 현실은 매우 다릅니다. 법무부 입장에선 밀려드는 난민 신청에 질려 '가짜 난민' 선별에 치중하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 한국의 난민신청 건수는 이제야 경제규모나 민주주의의 수준이 비슷한 다른 국가들에 맞춰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한국에선 1만5452건의 난민신청 중 고작 79명에게만 난민 지위가 부여돼 난민인정률이 0.4%에 그쳤습니다. 법무부가 이번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독일과 미국, 캐나다 등에도 비슷한 제한규정이 있다고 제시했는데, 이들 국가의 난민인정률은 30~50% 수준입니다.

A씨에 대한 졸속심사로 '처분 무효'라는 부끄러운 결과를 받아들고도, 법무부가 독일·미국·캐나다의 난민심사 인력과 틀, 난민에 대한 인도적 처우가 아닌 '신속 심사' 규정부터 베끼겠다고 나선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A씨는 운 좋게 난민 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과연 모두에게 그런 조력을 받을 기회가 돌아갈 수 있을까요? A씨의 판결문을 받아본 법무부와 출입국 당국이 '반인권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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