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9세 소녀가 건물 지붕을 타고 탈출한 '창녕 아동학대사건', 여행용 가방에 갇혀 학대를 당하다 결국 숨진 '천안 계모 아동학대 사건', 입양한 아기를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한 '16개월 입양아 사망사건', 아이의 시신을 냉장고에 유기한 '여수 아동학대 사건'까지… 올 한해도 안타까운 소식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동학대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자 정부는 지난 10월부터 아동학대 대응체계를 개편했다. 핵심은 아동학대전담공무원직을 신설, 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하겠다는 것. 기존 조사 업무를 담당하던 아동보호전담기관은 전문 사례관리 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하지만 아동학대에 대한 대처엔 여전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CBS심층취재팀은 경기도 안산시 아동학대전담공무원들의 하루를 동행 취재하며 현장의 모습을 담아봤다.[편집자 주]
(그래픽=고경민 기자)
"통화 못 하겠습니다! 끊겠습니다!""아버님?""옆에 사람이 있어서 전화하기 곤란하다니까요? 진짜 왜 그래!""그럼 저녁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안해도 된다고요 전화를!!""아버님 그렇게 조사 회피하시면 경찰서로 돌릴 수밖에 없거든요?""아니 회피하는 게 아니고 시간이 안 된다고요. 내가 죄 지었어요? 죄 지었느냐고요!"경기도 안산시청 별관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 이 곳에서 근무하는 아동학대전담공무원들은 최근 취재진이 찾은 날도 조사 대상자와 힘겨운 실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일 때문에 지방에 있다며 줄곧 화를 내던 아이의 아버지는 '경찰'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오후 7시에 만나자고 했다가 또다시 오후 3시 30분에 만날 수 있다며 태도를 바꿨다.
안산 시청 아동학대전담공무원 고명석 씨는 지자체 공무원이라고 해서 꼭 아동학대 조사가 수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은 사회복지직 공무원인데 경찰처럼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경찰에 조사를 거부하면 공무집행방해죄 등으로 처벌되지만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의 조사를 거부하면 과태료 처분에 그친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3일 경기도 안산시청 사무실에서 아동학대전담공무원 고명석 씨가 전화로 조사 대상자와 대면조사 약속을 잡고 있다.(사진=박초롱 기자)
안산시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은 현재 모두 8명. 내년까지 목표 인원은 20명이다. 취재진이 찾은 날에는 그나마도 뒤늦은 교육 일정 때문에 4명이 자리를 비웠다. 이날 안산시 아동학대 신고 조사를 단 4명이 하고 있었던 셈이다.
매시간 밀려드는 학대 조사업무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인데도 고 씨는 "그나마 이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11월 20일 기준 근무 중인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은 전국에 262명.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단 1명인 시·군·구가 대부분이다.
고 씨는 "한 명인 곳은 업무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이하 아보전)을 관리하는 업무 수준밖에는 안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일같이 저녁 10시까지 일하지만…지원은 '바닥' 수준고 씨의 하루는 전날 경찰에 접수된 아동학대 의심 신고를 파악하고 대면조사 일정을 잡는 것으로 출발한다. 하루에 아동학대 사건이 적게는 3건, 많게는 8~9건까지 접수된다고 한다. 아동 한 명당 만나야 할 사람도 보통 대여섯명은 되는 데다 조사 진행단계마다 안내하고 작성해야 할 서류들이 많다. 사무실 한켠에는 아동학대위험척도표, 아동학대 판단척도, 긴급임시조치신청서 등 각 조사단계에서 필요한 서류들로 가득찬 캐비넷이 보였다.
안산시 아동학대전담공무원 사무실에는 업무 중 참고해야 할 서류들이 캐비넷에 쌓여있다. 아동학대 사건 조사 및 후속조치 과정에서 작성해야 할 서류는 이 것보다 훨씬 많다(사진=박초롱 기자)
교사나 부모의 경우 조사 시간은 주로 점심시간 혹은 늦은 저녁이다. 일터 근처에서 아동학대 신고 조사를 하는 건 금기다. 그렇다보니 평일에는 아동학대전담공무원들의 업무시간이 한없이 길어진다. 고 씨는 "한 사건 당 조사가 적어도 3~4일 진행되고 계속 누적이 된다"면서 "거의 매일 저녁 9~10시까지 일한다"고 말했다.
이날 들어온 어린이집 학대 사건의 신고자와 오후 대면조사 약속을 잡은 고 씨는 사무실을 나섰다. 개인 차량을 이용해 법원으로 출발했다. 피해아동에 대한 보호조치와 관련한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서다.
고 씨의 차 뒷좌석에는 김밥 한 줄을 쌌던 은박지와 나무젓가락이 나뒹굴고 있었다. 법원으로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 학대피해아동쉼터로 이동하는 일이 잦다보니 차에서 식사를 해결할 때가 더 많다.
아동 보호와 관련한 보호 신청서를 내기 위해 법원을 찾은 아동학대전담공무원 고명석 씨(사진=이의선 인턴기자)
관용 차량을 이용할 수는 없느냐는 질문에 고 씨는 "지원이 돼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개인 전화번호나 주소가 차량에 붙어있어서 노출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어요. 실제로 한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 분은 가해 행위자가 아파트와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자택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에 그만두셨다고 해요."고씨의 말이다.
그의 사무실에 지원되는 업무용 핸드폰도 단 4개뿐이다. 사무실에서 업무용 핸드폰으로 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같은 사무실에서도 전화를 받았다가도 담당을 찾아 급히 전화를 바꿔주는 모습을 여러차례 볼 수 있었다.
최근엔 '아동학대전담공무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란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업무를 제대로 익힐 틈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돼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담겼다.
◇'전문성' 없이 '사명감'으로 일하라 해…코로나 사태 매뉴얼도 부족아동학대전담공무원들에게 무엇보다 힘든 점은 이미 심각해질대로 심각해진 아동학대 문제를 해결할 전문성을 갖춰나가기 어렵다는 자괴감이다.
고명석 씨는 이날 법원에 서류를 제출한 뒤 바로 안산시 아보전으로 향했다. 케이스에 대한 논의를 하고, 약속된 신고자와의 약속장소에 함께 가기 위해서다. 인원도 적은 데다 업무도 익숙지 않아 대면조사에 나설 때면 꼭 지역 아보전 담당자와 함께 나가고 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찾은 고명석 씨. 아보전 직원과 함께 아동학대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고, 대면조사를 나가기 위해 들렀다(사진=이의선 인턴기자)
"아보전의 경우 상담사들에 대한 100시간 교육과정이 있다"고 설명한 고 씨는 "아동학대 여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고 딜레마가 있는 일인데, 그런 교육과정들이 전담공무원한테 부족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아동보호전문기관같은 경우에는 (상담 등 업무를) 하기 위해 채용된 사람들이고 저희도 사회복지사라는 기본 자격증이 있지만 행정가의 입장에서 보던 사람들이어서 전문성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년부터는 그나마 아보전 직원들과의 동행 기간도 끝나기 때문에 노하우를 전달받기에는 시간마저 턱없이 부족하다. 밤낮없이 뛰고는 있지만 아동학대전담공무원들의 사명감만으로 해결하기에는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지침을 내려줘야 할 정부는 '우왕좌왕'이다. 업무가 시작된 10월 1일 이후에 매뉴얼이 내려오는가 하면, 안산시 공무원 8명 중 4명의 교육도 취재진이 방문한 기간, 즉 10월 1일 배치 이후 이뤄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대면조사 등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인데도 이와 관련한 정확한 매뉴얼이 없었다.
고 씨는 상담을 위해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보전 직원에게 '투명 유리판을 상담하는데 활용하는 것이 어떠냐', '사례 중 코로나 확진자가 있는데 어떻게 조사하느냐'며 의견을 구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아동보호전담기관·경찰도 '울상'…'심층 관리', '빠른 대응' 과연 가능할까?아동보호전담기관 역시 정부의 아동보호체계 개편 이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아동보호전담공무원들의 업무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다보니 아보전 직원들의 업무 역시 과중해지고, 사례관리 전담기관으로 거듭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이동건 전국아동보호문기관협의회 회장은 CBS와의 통화에서 "정부의 의도는 조사는 공공이 하고 아보전은 심층 사례관리 기관으로서 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는 것인데 (현재는) 이같은 능력을 키울 여력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공무원이 동행을 요청하면 현장조사에 나가야 하고, 말로만 조사 업무를 안 하는 것"이라면서 "사례조사와 관리 업무가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닌데 이를 나눠놓다보니 계속해서 (담당 공무원에게) 업데이트를 시켜줘야 하고, 이로부터 갈등과 혼잡이 시작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경찰 역시 난색이다. 특히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겨우 한 명 배치된 지역에서는 '인력 갈등'이 크다. 실질적으로 밤에 아동학대 응급 전화가 오면 경찰로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경찰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류정희 아동복지연구센터장은 "아동학대 대응체계 개편 이후 역할과 권한이 조정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력 및 인프라 배치가 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2022년까지 아동학대발견율(아동1천명당 아동학대 판단건수)를 4%까지 늘리겠다고 했지만 취재진이 만난 현장은 이같은 목표와는 요원해보였다.
◇'즉각 분리제도' 무조건 환영?… 피해 아동 사후관리 고민도 미흡현장에서는 의욕만 앞선 정책에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우려한다. 제도가 개편돼도 막상 현실에서는 취지대로 업무가 불가능한데, 정책만 쏟아진다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1년에 2번 이상 아동학대 신고가 들어와 학대 피해가 의심되거나 조사를 방해하면 그 즉시 보호자로부터 아동을 보호할 수 있는 '즉각 분리 제도'가 도입된다.
신고가 들어와도 조사나 조치가 늦어져 사망하는 아동의 사례를 보면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전국에 단 72곳에 불과한 학대피해아동쉼터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문제다.
학대 피해아동의 수가 연평균 4,6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즉각 분리제도가 시행되면 쉼터가 수용해야 하는 아이들의 수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쉼터는 이미 포화상태인 데다 대폭 증설하겠다는 계획 역시 없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의원은 "지난해 통계만 보더라도 학대피해아동쉼터 등으로 보호조치가 이뤄진 경우는 전체 학대아동의 12.2%(30,045건 중 약 3669건)에 불과하다"면서 실효성이 떨어지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강 의원은 "전국에 72개 쉼터 밖에 없기에 긴 시간 대기하거나, 대부분 학대가 이뤄진 원가정으로 복귀하는 상황"이라며 보다 섬세한 정책을 주문했다.
익명의 또다른 아동보호전담공무원은 "쉼터에 자리가 없어서 아이를 다른 지역 쉼터까지 보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타 지역 아동보다는 각 지역 아동부터 받으려는 경우도 있다보니까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프라에 한계가 있다보니 지자체 별로 아동학대 관리 업무가 원활해지지 않고, 그렇다 보면 결국 학대율이 낮아진 것으로 성과지표를 삼을까 우려된다"면서 "학대 발견율이 높아도 지속적인 발굴 및 관리가 잘되면 정책이 잘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예산'…'곳간열쇠'없는 복지부, 결국 '의지' 문제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자극적인 내용이 보도되고 국민적 공분이 일며 시선이 쏠리지만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예산 문제를 꼽는다. 단순히 예산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아동보호전문기관 관련 예산은 범죄피해자보호기금에서, 학대피해아동쉼터 관련 예산은 복권기금에서 충당한다. 보건복지부의 일반 회계가 아니다. 아동학대 관련 예산 중 보건복지부의 일반 회계로 충당되는 것은 2020년 예산 기준 단 3.9%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의 일반 회계로 편성되지 않고 '기금'을 통해 예산을 충당하면 보건복지부가 해당 예산 증액에 권한을 갖지 못한다. 보건복지부가 '곳간 열쇠'를 쥐지 못하니 사실상 대폭 증액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픽=안나경 기자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극적인 사건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면, 소폭 증감을 반영하는 정도로만 일반 회계 예산이 추가편성되는 데서 그친다. 제도를 아무리 손봐도 예산 지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문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동건 협회장은 "정부의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국가가 아동학대에 대해 책임감 있는 자세를 취한다면 기금에서 아동학대 방지 사업 예산을 충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보건복지부 일반 회계 예산에 정확히 달아서 사업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강선우 의원 역시 "예산 편성을 일반회계로 돌리고 또 예산도 늘리고, 그러니까 즉 규모도 늘리는게 정답인데, 현재로써는 이런 것들이 녹록치가 않은 현실"이라면서 "국회에서 국민적 관심을 든든한 뒷배로 삼아 과감한 결단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