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회 CJ ENM 대표이사가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CJ ENM센터에서 엠넷 '프로듀스' 시리즈 순위 조작 논란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고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자료사진)
"국민 프로듀서님을 기다립니다."2016년 방송한 엠넷 걸그룹 육성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시즌1)은 시작부터 '국민 프로듀서'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소속사가 있는 연습생부터 개인 연습생까지, 총 101명의 연습생 중 데뷔 조 11명은 결국 '국민 프로듀서', 즉 시청자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이 프로그램이 내세운 가장 중요한 규칙이자 차별화 지점이었다.
시즌1은 신드롬에 가까울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엠넷은 보이그룹을 뽑는 시즌2('프로듀스 101' 2), 한일 양국에서 활동할 걸그룹을 뽑는 시즌3('프로듀스48'), 빌보드에 도전할 초대형 프로젝트로 확장한 시즌4('프로듀스X101)까지 매년 새 시리즈를 선보였다. 하지만 시즌4 최종화 다음날부터 생방송 문자 투표 조작 의혹이 일었고, 결국 수사 대상이 된 '사건'으로 커졌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시청자 문자 투표 결과를 조작해 임의로 합격자를 선발한 엠넷 '프로듀스' 전 시리즈(시즌1~4)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14조(객관성)를 위반했다고 봤고, 각 3천만원씩 총 1억 2천만원의 과징금 부과를 결정했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만든 안준영 PD와 김용범 CP는 사기 등의 혐의로 지난 18일 열린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또한 시즌1 김수현·서혜린, 시즌2 성현우·강동호, 시즌3 이가은·한초원, 시즌4 앙자르디 디모데·김국헌·이진우·구정모·이진혁·금동현 등 투표수 조작으로 인해 피해 본 연습생 12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국민 프로듀서'라는 말을 유행어로 만들고, 데뷔한 프로젝트 그룹이 큰 사랑을 얻은 것은 물론, 많은 유사 프로그램을 낳는 등 '프로듀스' 시리즈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결말은 딴판이었다. '전 시즌 조작'으로 판명된 탓이다. 엠넷은 기자회견을 열어 대국민 사과와 피해자 보상을 약속했지만, 쏟아지는 의심 어린 시선을 여전히 거둬내지 못했다. 공정성과 신뢰 회복이라는 무거운 과제가 남았다.
가요계 관계자 A씨는 "'터질 게 터졌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시즌1부터 어느 정도 의심을 하는 반응이 있었다. (조작과 관련해) 소속사 일부도 미리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번 사태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좀 더 공정성에 신경 쓰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거라는 예상도 나온다"라고 말했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는 "공정한 게임이 될 거라는 환상을 깬 사례"라며 "'프로듀스' 시리즈는 한발 더 나아간 케이스다. 단순히 (특정인을) 더 많이 노출하는 게 아니라 먼저 곡을 알려줘 연습을 하게 한다든가 순위를 바꿔버려 일종의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다. CJ ENM은 상응하는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희아 대중문화 저널리스트는 "CJ ENM은 이게 너무나 잘 팔리는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 놓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슈퍼스타K' 때부터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하나의 '재밋거리'로 만들어버렸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유용성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증명한 사례다. 다른 방송사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어도 엠넷이 오리지널리티를 가질 수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엠넷은 2016년부터 '프로듀스 101'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총 네 시즌을 방송했다. (사진=CJ ENM 제공)
이어 "여전히 많은 연습생과 가수 지망생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한다. 이번 조작 사태를 보고 이들은 과연 자기가 도구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을까. '꿈'이라는 명목하에 도구화되는 것도 참고 견디면서, '이 업계는 원래 그렇다'며 부정과 부조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봐 걱정"이라고 전했다.
권 활동가는 '프로듀스' 시리즈를 통해 방송사가 기획사 역할까지 해내려고 했다는 점, 그 때문에 여러 무리를 자초했다는 점에서 이번 조작 사태가 소수 제작진의 개인 일탈로 치부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방송사에서는 시청률 면에서 성공할 요소를 갖춘 프로그램이었고, 중소형 기획사에게는 소속 연습생들을 노출할 기회여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지만, 각 주체의 욕심이 발현되며 탈이 났다"라며 "CJ ENM은 새로운 스타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로 인한 수익까지 가져가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무리한 행태가 있었다. '프로듀스' 시리즈 조작 사건을 단순히 PD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면 안 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가요 관계자 B씨는 '프로듀스' 시리즈가 지닌 순기능도 분명 있었지만, 조작을 자초하면서 연습생, 가요 지망생들의 기회가 축소되는 것을 우려했다. B씨는 "왜 이 프로그램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지원했을까. 그만큼 스스로를 알릴 창구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모두 공평하게 n분의 1 분량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얼굴을 알리는 게 이득이지 않을까 하고 출연한 이들도 있었을 거다. 조작 사태가 밝혀지면서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도전이 될 오디션 프로그램(제작)이 어떤 형태로든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 점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B씨는 "(조작 사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긍정적으로 변화한 점도 있을 것 같다. 엠넷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참관인 제도를 도입했고, 다른 방송사에서도 오디션 프로그램 완성도와 투명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머리를 맞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전했다.
권 활동가는 CJ ENM이 오디션 프로그램 전반을 재점검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단지 '공정성'과 '순위 조작'만이 문제는 아니다. 열악한 제작환경, 인권침해 위험성 등을 두루 살피고 개선하도록 힘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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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스' 시리즈를 연출한 안준영 PD (사진=박종민 기자/노컷뉴스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