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에 이어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이 최근 일본을 방문해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비롯한 한일관계의 해법을 타진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4일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에게 별로의 인사를 건네는 등 관계 개선에 적극성을 나타냈다.
전임자에 비해 실용주의 성향이 있는 스가 총리 취임에 이어 미국도 한미일 공조를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 등장을 앞둔 시점에 전환점을 마련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일본은 기존 입장을 완강히 고수하고 있다. 스가 총리는 한국이 먼저 강제징용 문제를 풀 것을 요구하며 외교는 아베 전 총리를 계승할 것이란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남관표 주일대사는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일본 정부가 조금 진전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했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문 대통령, '방역올림픽' 협력카드로 관계 개선 타진…日 "강제징용 해결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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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꽉 막힌 한일관계를 뚫기 위한 방책이자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도쿄 올림픽이다.
세계적 코로나 확산 속에 내년 7월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양국이 적극 협력함으로써 화해의 계기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뿐만 아니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일을 추진하는 등 북일관계 진전의 기회로도 삼아 '방역 올림픽' '평화 올림픽'의 일석삼조를 기대하고 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모델을 활용한 것이다.
김진표 의원은 일본의 김정은 위원장 초청 가능성을 거론하는 한편, 강제징용 해법 등 난제는 도쿄 올림픽까지 '봉합'하자는 구체적 제안도 내놨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 협력 카드가 과연 협상 칩으로서 유용한지는 의문시 된다.
일본 자민당 실세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은 13일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외교의 활로를 찾는데 도쿄 올림픽을 활용하겠다는 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환영했지만 그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 성공을 위해 협력하는 것은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를 지렛대 삼아 일본으로부터 뭔가 양보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조진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순수한 스포츠 행사를 정치적, 외교적으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상대 입장에서 좋게 볼 리 없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의 방일은커녕 북한의 올림픽 참가 여부조차 장담할 수 없고, 도쿄 올림픽의 정상 개최 자체부터가 불확실하다.
평창 올림픽 모델도 올림픽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전에 문 대통령이 평창행 KTX 안에서 한미연합훈련 연기를 과감하게 거론했기에 성공 가능했다.
◇"스포츠행사 정치적 이용 인상 줄 수 있어" 일본 견인할 협상칩 효과 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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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부도 '이벤트 중심주의'의 한계는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관계 복원을 위한 마중물 이상의 가치는 두고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비록 스가 내각 등장에 따른 변화라고는 하나 일본에 대한 유화적 접근이 자칫 조바심의 발로로 오인될 가능성이다.
이는 바이든 신 행정부가 과거 오바마 시절의 '일본 편들기'를 재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과도 연결된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미국이 (한일간) 중재를 한다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그게 만약 일본과 공조해서 한국을 압박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겐 엄청난 도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로선 박근혜 정부가 스스로 설정한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프레임에 빠져 2015년 세밑에 위안부 협상을 졸속 타결한 트라우마가 있다.
과거의 쓰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자칫 불행한 결과를 되풀이 할 수 있다.
예컨대 올림픽 성공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선의의 표시가 자칫 한국이 저자세로 돌아섰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 대미 로비에 능한 일본이 이를 대세로 굳히려 시도할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된다.
◇유화적 태도로 '조바심 내는 한국' 오인 우려…위안부 졸속 합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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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본은 위안부 협상의 긴 줄다리기 과정에서 '중국 경사론'과 '골대론' '한국 피로증'(Korea Fatigue) 등을 유포하며 한국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한국이 미국보다 중국에 기울어 있고 협상 목표(골대)도 자주 바꾸는 신뢰할 수 없고 피곤한 존재라는 악의적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협상에서 실패한 보다 근원적 이유는 과거사와 경제·안보의 투트랙 전략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박 대통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며 대일 강경책으로 일관했고 과거사 갈등을 경제·안보 문제와 분리하지 않았다.
스스로 원트랙 족쇄를 채운 나머지 출구전략은 애초 없었고 결국 미국의 압박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채 협상을 끝내야 했다.
이와 비교하면 지금의 한일 갈등은 5년 전과 정반대의 형국이다. 한국은 철저히 투트랙 전략으로 임하는 반면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수출 규제로 대응했듯 과거사와 경제를 한데 묶는 원트랙 전략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예전처럼 한일관계에 개입한다고 해도 결코 불리하다 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朴 정부, 과거사-경제 묶는 '원트랙' 족쇄로 협상력 약화…지금은 韓日 정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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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한일 과거사 갈등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것이 안보 영역으로까지 확대돼 한미일 삼각체제를 훼손하는 것만은 결단코 막아왔다.
오바마 정부 당시 웬디 셔먼 국무차관이 "민족감정은 악용될 수 있고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적을 비난해서 값싼 박수를 받아내기는 어렵지 않다"고 비판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과거사 몰입을 겨냥한 것이다.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지금 한미일 체제를 흔드는 책임은 과거사와 경제·안보 구분 없이 총체적 한국 때리기를 지속하고 있는 일본에 있다.
스가 내각은 한국이 일부 오해를 받을 만큼 유화적 태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비타협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다소나마 점수를 잃었다. 반면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나름 성의를 보였다는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든 측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인권과 법치의 가치를 중시하는 미국 민주당 정부의 전통을 감안할 때 강제징용에 대한 한국 사법부의 판결은 그 자체로 존중돼야 한다. 삼권분립 원칙마저 위배하며 행정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일본 측 주장이 먹히기 힘든 것이다.
◇미국이 한일관계 개입해도 해볼 만…오염수 방류 등 압박카드로 정공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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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객관적 여건을 따져보면 개최 여부도 불투명한 도쿄 올림픽 카드에 의존해 섣부른 '봉합'에 나서기 보다는 정공법적 접근이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이르면 다음 달 중에 강제징용 현금화 조치가 이뤄질 수도 있는 가운데 한일 간 충돌을 잠시 유예하는 고육책으로서 의미는 있다.
하지만 명분과 논리상 한국이 일본에 결코 밀리지 않고, 한일관계에 관한 한 미국이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의 '피해자 중심주의'는 과거 위안부 합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산물인 만큼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다. 미국이 동맹인 한국 정부의 핵심 가치까지 건드리며 압박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한 전문가는 "(한일 갈등 사안) 봉합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 피해자들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일 간에는 강제징용 등의 문제 외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라는 오히려 더 시급하고 중대한 사안도 걸려있다.
이에 대한 정부의 '조용한 외교'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하와이와 괌도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한미 공조도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강경화 장관이 최근 국감에서 원전 오염수 방류를 일본의 '주권적 결정 사항'이라고 밝힌 것을 볼 때 정부의 의지가 의심된다.
강온 양면 압박카드가 있음에도 사용을 주저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