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려 일한 만큼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최전선의 합의다. 하지만 주당 최대 5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지 않는 것, 사회가 정한 최저한도의 보상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것조차 여전히 누군가에겐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고(故) 전태일 열사가 몸담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에서 하루 14시간씩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했던 '시다'들은 오늘날 상시적인 임금체불에 노출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과 겹친다. 이들은 입국과 고용, 퇴직에 이르는 전반적의 과정을 '국가'가 관장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밀양 깻잎 농장 이주노동자 티다(가명)씨의 자필 노동시간 기록 노트. (사진=지구인의 정류장 제공)
◇"10시간↑일했는데 할당량 따라 임금삭감"…체불액 수천만원도 '수두룩'
캄보디아 출신 티다(25·여)씨는 지난해 6월부터 지난달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경상남도 밀양의 한 깻잎 농장에서 매일 11시간 가까이 일했다. 농장주와 작성한 '표준근로계약서'에는 △1일 8시간 노동 및 3시간 휴게시간 △1주 중 하루 휴무가 명시돼 있었지만,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농장주는 티다에게 매일 오전 6시 반 전에 출근할 것, 점심시간은 40분 이상 끌지 않을 것, 퇴근은 오후 5시 반 이후에 할 것을 강요했다. 계약 조항과 달리 티다가 맘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은 점심에 주어진 40분이 유일했다.
한 달에 쉬는 날도 하루 이틀이 될까 말까였다. 그러다보니 실제 월 근로시간은 200시간을 훌쩍 넘어 280~300시간에 달했다. 하지만 매월 티다의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불과 160만원. 시급으로 환산해보면 평균 5500원 가량으로, 당시 최저임금(8350원)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심지어 티다는 '1일 작업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다. 당일 정해진 깻잎 수확량을 채우지 못하면 임금을 삭감당하기까지 했다. 날마다 17박스(1만 7천장) 분량의 깻잎을 따지 못하면 1박스당 5000원을 일당에서 빼내는 방식이었다.
티다가 못 받은 급여는 최저임금을 적용,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최대 월 90여만원에 이른다. 티다가 근무한 약 1년 3개월을 곱하면 1300만원이 넘는 금액이 미납된 셈이다.
티다는 이같은 매일의 근무내역을 자필로 수첩에 꼬박꼬박 기록했지만, 고용노동청의 근로감독관은 '고용주의 서명이 있어야만 유효하다'며 증거로서의 효력을 부인했다. 티다는 결국 체불임금의 일부만 돌려받는 선에서 합의를 했다. 현재는 다른 농장으로 근무지를 옮긴 상태다.
경기도 포천의 농장에서 일하던 캄보디아인 A씨가 임금체불 문제를 제기하자, 농장주가 A씨의 기숙사를 망치로 부수고 들어온 모습. (사진=지구인의 정류장 제공)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캄보디아 출신의 이주노동자 A(27·여)씨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경기도 이천의 한 채소농장에서 올해 3월까지 약 4년 9개월 정도 일했지만 지난 2016년 7월부터 3년 8개월 동안이나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비전문취업(E-9) 비자의 만료일이 약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A씨는 시민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장은 오히려 기숙사 문을 망치로 부수고 들어와 근무시간 등을 적어놓은 공책을 찢고 불태웠다.
일한 기간을 최저임금으로 산정해도 체불임금은 6천만원에 달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이 중 3400여만원만 인정했다. 설상가상 A씨는 기타(G-1-4) 비자의 기한이 만료돼 한국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A씨는 사장을 검찰에 특수협박·사기 혐의로 고소했고, 현재 형사조정이 진행 중이다.
◇임금체불 증명할 길 기록일지뿐인데…"입증책임 노동자에 전가"
임금체불을 겪는 이주노동자들은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넣게 된다. 보통 특별사법경찰인 근로감독관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기소·불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한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등에 따르면 검찰 역시 이를 그대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노동자들의 실 근로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체불된 임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주로 이주노동자가 제시하는 '근로시간 기록일지'를 참조한다. CC(폐쇄회로)TV라도 달려있으면 다행이지만, '5인 미만' 농축산 사업장들은 이마저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서다.
문제는 수사기관에서 이주노동자의 '기록일지'가 신빙성이 없다고 배척한다는 점이다. 유일한 증거가 사라지면 이주노동자들이 흘린 수년간의 땀을 보상받을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따임피가 수기로 작성한 근무시간 기록일지. (사진=법률사무소 원곡 제공)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에서 '일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던 따임피씨 사건도 그랬다. 2년 넘게 이 농장에서 일했던 따임피씨는 매일 10시간이 넘게 일했지만 근로계약서에 적힌 대로 '8시간' 분(分)의 임금만을 지급받았다.
농장주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신고한 그녀는 임금체불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 벽걸이 달력에 근무시간을 적은 뒤 이를 노트에 옮겨 적어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불기소 처분이 났다.
해당사건을 맡은 의정부지검은 △연필로 지우고 다시 기재한 흔적이 있다는 점 △출근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의 촬영시점은 오전 7시 20분인데, 일지 상 출근 시간은 오전 7시 10분이라고 적힌 점 등을 들어 따임피의 기록일지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임피는 결국 검찰에 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요청했지만 거부됐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한 상태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는 "노동자가 2년 치를 기록한 기록 중 하루가 안 맞거나, 10분이 틀렸다고 '네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건 부당하다"며 "고용주의 서명이 있는 일지가 필요하다는데, 일지를 따로 작성하는 걸 고용주가 아는 순간 이를 빼앗기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어떤 감독관은 왜 조사도 하기 힘든 농촌으로 일하러 오느냐고 되물을 정도였다"며 "옆에서 그 말을 듣고는 나라에서 근로계약을 허락해서 일하게 됐다고 반박했다"고 씁쓸해했다.
일부 고용주는 노동부의 숙소비 공제 지침이 내려온 뒤 이면계약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사진=지구인의 정류장 제공)
숙소비 공제를 허용하는 고용노동부의 지침은 임금체불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지침에 따르면 매달 숙식 비용으로 통상 임금의 8∼20%까지 징수가 가능하다. 이를 악용하는 고용주들은 처음에는 기숙사비 징수 방침을 밝히지 않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숙식 비용으로 정당하게 공제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포천 이주노동자센터 김달성 목사는 "나중에 이주노동자들이 월급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면 합리화하는 이야기로 '기숙사비'로 뗀 거라고 이야기한다"며 "한 사람당 10만원도 떼고, 50만원도 뗀다"고 설명했다.
물론, 임금체불보증보험이 피해를 보상하려는 방편으로 남아있기는 하다. 하지만 임금체불보증보험의 보증금액 최대한도는 1인당 200만원에 불과하다. 피해 금액에 대부분 거의 미치지 못한다. A씨의 경우처럼, 사업주가 가입하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소액체당금제도 마찬가지다. 소액체당금은 퇴직 노동자가 임금과 퇴직금 등을 받지 못해 법원의 체불 관련 확정판결을 받으면 국가가 사업주를 대신해 일정 범위 내에서 체불 임금 등을 지급하는 제도다. 그러나 상시 근로자 수가 5인 미만인 농림어업장은 산재보험에 가입할 의무가 없어 해당 제도의 혜택에서 제외된다.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가 지난 12일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은지 기자/자료사진)
◇"초과근무 입증은 고용주가 져야"…해외선 '기록관리 책임' 사용자에전문가들은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체불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유로 거대한 '취업 브로커'인 국가의 무능을 지적했다.
따임피씨를 대리해온 조영신 변호사(원곡 법률사무소)는 "정부는 현행 고용허가제 아래 이주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위반에 노출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며 "임금체불이 발생한 사업장에 불이익을 주고, 문제가 계속 해결되지 않는 경우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게 하는 방식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고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실질적 숫자나 (피고용인의) 근무시간은 이주노동자보다는 당연히 사용자가 쉽게 관리하고 알고 있는 정보들인데 노동자들에게 일괄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불리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근로감독관이 일조시간이 길 때와 짧을 때 등 한 달이라도 (진정한 이주노동자에 대해) 표본으로 조사를 해보면 임금체불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텐데 '당신 노트의 몇 군데가 틀렸다'는 데만 수사기록이 집중돼 있다"며 "(조사 시) 실사조차 안 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임금체불 사례가 적발된 고용주들에게 이주노동자 채용을 원칙적으로 금하는 등 보다 확실한 '페널티'를 부과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조 변호사는 "임금체불로 사용자가 받는 처벌은 보통 벌금인데, 액수는 체불액의 10분의 1 등 100만원도 안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며 "유죄로 인정되기도 어려운데 인정돼봤자 그 정도니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입증책임을 고용주에게 지우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입증책임을 고용주에 의무화시켜야 한다"며 "누가 노동했느냐, 얼마나 했느냐는 고용주가 입증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입증책임을 '고용주'에 지운다. 대표적으로 호주는 지난 2017년 공정근로법(Fair Work Amendment Act)를 통해 입증책임을 고용주에 지웠다. 불안정한 지위에 놓인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법으로 고용주가 근무 기록 정보를 소홀히 관리했을 경우 처벌이 강화됐고, 노동자가 근무시간만큼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소송을 제기할 경우 고용인이 충분한 증거를 통해 항변하지 못하는 한 피고용인이 주장하는 초과근무가 인정되는 제도로 바뀌었다.
미국은 좀 더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체불임금에 대한 입증책임은 노동자에게 있지만, 고용주가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경우 이를 완화한다. 미국 연방법(Fair Labor Standards Act·FLSA)에 따르면 고용주는 근로자의 임금과 근로시간 등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
미국 대법원은 근무시간 기록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 노동자가 급여를 받지 못한 부분에 대해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수행한 일의 양과 정도를 보여줄 수 있다면' 입증책임은 고용주에게 옮겨진다고 판단했다. (Anderson v. Mt. Clemens Pottery Co.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