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 회장. (사진=연합뉴스)
SK하이닉스 등 SK그룹 8개사가 국내 최초로 'RE100(Renewable Energy 100)'에 가입 신청을 했습니다.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재생에너지는 햇빛과 바람 등 자연이 주는 힘으로 전기를 만들어 환경과 내 몸에 해가 되지 않는 안전한 에너지를 뜻합니다. 이렇게 2050년까지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를 통해 발전된 전력으로 조달하겠다고 약속하는 겁니다.
RE100은 정부가 강제한 것이 아닌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는 일종의 캠페인이라서 더 의미 있게 평가되고 있죠.
RE100은 지난 2014년 영국 런던의 다국적 비영리기구 '더 클라이밋 그룹'에서 발족돼 애플, 구글 등 IT 기업부터 BMW, GM 등 자동차 회사, 스타벅스, 버버리, 유니레버, 이케아 등 260여개 글로벌 기업이 가입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난 2일 가입 신청서를 낸 SK그룹 8개사가 유일합니다.
RE100을 달성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태양광 발전 시설 등 설비를 직접 만들어 전기를 쓰는 방식과 재생에너지 발전소에서 전기를 사서 쓰는 것입니다. 사서 쓸 때도 발전소와 계약을 하는 경우가 있고,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력에 더 많은 요금을 내는(녹색 요금) 등이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RE100에 참여하려면 생산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친환경 의지만 있다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발전소를 지을 충분한 땅도 있어야 하고, 건설 및 운영 관리에 드는 막대한 비용도 감당해야 합니다 "RE100이 기업의 부를 상징한다"는 웃지 못할 우스개소리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돈을 써가면서 RE100을 이행하는 걸까요?"
기업들이 세계 전력소비의 40~5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모두 재생에너지 사용을 하게 된다면 세계의 탄소배출을 약 15%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의 큰 위기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기후변화와 미세먼지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거죠.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결정한 주된 이유는 친환경에너지 사용에 대한 이해관계자 요구 증대, 재생에너지 지원의 경제성 개선 등이 있습니다.
각국이 에너지 기후변화 정책에 부응하면서도, 환경 친화적으로 생산활동을 지속해 지역 사회, 고객, 투자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이런 흐름 안에서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개선됨에 따라 공장의 효율적인 에너지 소비를 목적으로 전환을 선택하는 기업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있습니다. 과거 기업의 목표가 금전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기업이 소비자들로부터 이익을 내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됐습니다. 특히, 기후 위기 대응은 전 세계가 경각심을 갖고 보는 주요 이슈인 만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렇다고 기업이 이전엔 안 쓰던 돈을 자발적으로 쓸 정도인가 싶은데요, 사실 속사정도 있습니다.
온실가스 감축을 비롯한 글로벌 환경 규제 강화 추세 때문입니다.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세 등 전 세계 국가에서는 탄소 배출 관련 제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당사의 탄소 배출량을 직접적인 비용으로 인식한 것이죠.
또 국제 신용평가사나 투자자들이 기업 경쟁력을 평가할 때 기후 변화 대응 지표를 넣습니다. 우리나라도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40%까지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RE100 참여 기업들은 투자할 곳이나 사업장을 둘 나라에 미리 대응을 하는 겁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착한 기업이라기보다는 "눈치가 빠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신재생 에너지.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이외에도 석유나 석탄 가격은 경제 상황에 따라 가격 등락이 심하지만, 재생에너지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입니다. 초기 비용은 들더라도 경영 리스크는 줄일 수 있는 거죠.
◇RE100 취지는 좋은데, 문제가 있나요?RE100 참여하는 또 다른 이유, 고객사의 요구도 있습니다.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RE100에 참여하면서 당사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들도 재생에너지에서 나온 전력으로 만들도록 부품 공급사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BMW나 구글, 애플 등이 RE100에 참여하면서 관련 부품 업체인 SK하이닉스, LG화학, 삼성 SDI 등에 RE100을 요구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애플의 요청에 "OK"라 응했고 삼성전자도 지난 국감에서 "국내의 제도와 여건이 갖춰지면 RE100을 추진하겠다"고 의지를 밝히긴 했습니다.
시장을 선점한 글로벌 기업은 RE100을 통해 이미지 개선과 진입 비용을 올릴 수는 있지만, 협력 업체엔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객사와 거래를 이어가려면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한 투자를 별도로 해야 하는 거죠. 만약 이를 감당하기 시작하면,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품 생산 단가는 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국 소비자 몫으로 전가되고요.
전문가들은 이렇게 핵심 부품 단가가 올라가게 되면 "시장이 프리미엄과 보급 시장으로 구분될 것"이라 전망합니다. 프리미엄 제품은 비싸지만 친환경적으로 생산된 제품이라는 착한 이미지를, 보급화 제품은 그 반대 이미지를 가지게 될 테고요.
글로벌 기업 대부분은 이미 프리미엄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착한 브랜딩 가속 페달까지 밟게 됩니다. 중소 규모의 부품사나 제조사 등은 프리미엄 시장은 아예 넘볼 수 없는 장벽이 더욱 공고해질 전망입니다.
◇탄소는 비용, 비용은 무역 장벽…RE100은 부의 상징?RE100 참여 기업이 협력업체에도 재생에너지로 제조한 제품을 요구한다는 것은 반대로, '재생에너지로 제조한 제품이 아닌 경우에는 애플 등 글로벌 기업에 납품조차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기업의 경우 막대한 자본금으로 재생에너지를 직접 생산하거나 투자하는 식으로 고객사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겠지만, 자금 여력이 넉넉지 않은 중소기업은 거래처가 끊기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RE100이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수출국이기 때문이죠. 삼성과 SK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부품들은 대기업이니만큼 여력이 되지만 삼성과 SK에 납품하는 협력업체는 상황이 다릅니다.
손실을 감수해가면서 재생에너지로 전환을 해야 할지, 아니면 RE100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고객사를 찾아야 하는 건지. RE100에 참여하는 글로벌 기업이 많을수록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글로벌 기업이 많은 서구권 국가들이 경제적 우위를 이어가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합니다.
온실가스 배출.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영국, 독일 등은 산업혁명이란 명분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해 경제적 기득권을 차지했죠. 그리고 이 온실가스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온실가스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경제적 우위를 이어가겠다"는 전략이 아니냐는 겁니다.
'실제 RE100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곳은 유럽'이라는 걸 그 근거로 꼽습니다. "이들 국가가 에너지 부문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RE100을 도입했을 때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이 때문에 "RE100은 재생에너지 선도국인 유럽 국가들이 무역의 판을 뒤집기 위해 만들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앞서 언급했듯 "RE100이 기업의 부를 상징케 하고, 이는 결국 기업의 계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섞인 전망이 나오기도 합니다.
◇왜 우리나라는 이제야 동참하는 건가요?전문가들은 '한국전력이 독점하는 독특한 전력 구조로 인해 재생에너지 구입이 불가능한 구조가' RE100의 가장 큰 진입장벽이라고 지적합니다.
국내에서 재생에너지를 기업이 쓰게 하는 방식은, 발전 사업자가 태양광이나 수력, 풍력으로 발전을 하면 한국전력이 일부 비용을 대는 형태입니다.
즉,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늘리면 가장 먼저 한국전력이 줘야 하는 돈이 많아지는 거죠. 그럼 재생에너지로 전기를 만들면, 쓸 사람이 사야할텐데요, 아직 국내에는 전기를 사고파는 제도가 없습니다. 한전이 전력을 독점하고 있어 발전사와 소비자간 직접 거래가 되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전력 소비자가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를 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전기에 생산지 표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자원으로 만든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재생에너지 인증을 받고, 발전소와 기업이 계약을 해서 전기를 공급하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또 지금처럼 한전이 중앙 집중식으로 전력을 배분하지 말고, 재생 에너지는 생산한 지역에서 먼저 소비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고요.
한국은 재생에너지로 발전시킬 환경이 안된다는 지리학적 한계도 있습니다. 풍력, 수력, 파력, 태양력 등 재생에너지 생산은 평야가 넓고 자연 환경이 받쳐줘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거죠.
특히, 태양력은 막대한 부지를 확보해야 하는데, 평지가 거의 없는 한국에선 산을 깎아 만들어야 하고, 이는 오히려 벌목으로 인한 자연파괴를 부추긴다고 꼬집습니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어쨌든 지구는 하나인데, 지켜야하지 않을까요?우리나라는 지난 7월 그린 뉴딜을 통해 RE100에 대한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2021년부터 녹색 프리미엄제와 재생에너지 공급인정서(REC) 구매, 제삼자 전력구매계약(PPA) 등 다양한 이행방안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RE100을 실행하기엔 제도적 정비가 여전히 부족하기만 합니다. 정부 관계자도 "녹색요금 수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비롯해 기업 간 전력 거래, RPS 물량과의 중복인정 여부, 녹색요금의 효과적 활용방안 등의 세부 조정이 필요하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합니다.
RE100은 친환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캠페인입니다. 그러나 "국내 기업은 돈부터 걱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고, 제도적 여건도 마련돼있지 않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입니다. "공장 지붕형 태양광으로 생산한 막대한 전력은 주말이 되면 아무 데도 쓰지 못하고 그냥 쓰레기 전기가 되고 있다"고 있다죠.
어쨌든 지구는 둥글고 또 하나뿐이라 RE100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필요한 변화라는 인식에는 반기를 들지 못합니다.
이에 글로벌 기업이나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이나 RE100 비참여 기업들도 동참할 수 있도록 재생에너지 구축 비용 제공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기후 전문가들은 주장합니다. 혹은 후발주자들이 배출하는 탄소량만큼, 자본력이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더 감축 의무를 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친환경'이라고 해서 청사진만 그릴 게 아니라 질문을 해봐야할 때입니다. '재생에너지 전환'을 명분으로 내세운 RE100이 결국 타고난 환경과 가진 돈이 좌우하는 새로운 무역장벽을 만드는 건 아닌지, RE100 말고도 집안 배경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대안은 없는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