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 A씨(28)가 지난 8일 CBS노컷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박정환 기자)
"우리나라였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두번씩이나 탈옥하고 마약판매까지 한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어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요. 제발 꼭 잡았으면…."지난 2016년 10월 필리핀 팜팡가주(Pampanga)의 한 마을 인근 사탕수수밭에서 한국인 남녀 3명이 끔찍하게 살해된 이른바 '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사건'. 주범인 박모(42)씨는 현지에서 탈옥해 도피 중이다. 반면 피해 유족은 오히려 '고통'에 갇혀 있다.
CBS노컷뉴스가 만난 유족 A씨(28)는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다. 출장을 다녀오겠다며 "어머니와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4년 전 통화 음성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A씨는 박씨를 하루 빨리 붙잡아 국내로 송환해 '죗값'을 치르게 해달라고 거듭 호소했다.
◇"두번째 탈옥과 마약 판매, 거기에 호화생활?…화가 났다"
'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사건'의 주범 박모(42)씨로 추정되는 닉네임 '전세계'가 텔레그램을 통해 마약을 홍보하고 있는 모습. (사진=텔레그램 비밀대화방 캡처)
주범 박씨는 당시 사건 뒤 약 한 달만에 한국 경찰과 필리핀 당국과의 공조로 검거됐다. 하지만 현지 외국인 전용 수용소에서 탈주했고, 두 달만에 다시 붙잡혀 교도소에 수감됐으나 지난해 10월 '두 번째 탈옥'에 성공했다. 이후 박씨는 도피 중에 국내에 은밀하게 마약을 판매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관련 기사 : CBS노컷뉴스- [단독]'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 주범, 도피 중 은밀한 마약판매)
A씨는 박씨의 이러한 행각에 대해 "두번째 탈옥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갔다"며 "도피해서 이렇게 판을 크게 벌이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일각에서는 박씨가 상당한 돈을 갖고 있고 마약판매 수익까지 더해 도피 중에도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 나온다. 탈옥에 재차 성공한 것도 필리핀 교도소 관계자를 매수한 결과가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A씨는 "기본적으로 박씨가 돈이 많고 이를 바탕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접했다"며 "화가 많이 났고, 박씨를 더욱 찾고 싶었는데 저는 힘이 없고, 갈수록 한계만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건 발생 당시 박씨를 국내로 송환할 계기가 마련됐지만, 박씨의 연이은 탈옥 등으로 결국 기회가 무산된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고 밝혔다. A씨는 "박씨가 한국에 있느냐, 필리핀에 있느냐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며 "한국에 있었다면 처벌에 있어서 훨씬 상황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범은 모든 책임 박씨에게 돌려…주범이 잡혀야"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아버지가 필리핀으로 건너간 2016년 당시 A씨는 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필리핀으로 출장을 떠난다고 했다. 워낙 사업차 출장이 잦은 아버지이기에 별탈 없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A씨는 "어머니와 동생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저도 방황을 좀 했다"며 "그 와중에 박씨 공범이 한국에서 잡혔고, 재판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박씨 공범 김모(38)씨는 범행 이후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국내에서 강도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3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A씨는 김씨가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을 때까지 전 과정을 지켜봤다. 김씨가 "모든 일은 박씨가 시킨 것"이라며 제안한 합의도 거절했다. A씨는 "김씨가 편지도 보내왔는데 모두 박씨 탓을 하면서 자기 범행을 합리화하는 모습이 너무 황당했다"며 "나중에 박씨가 잡히면 그대로 보여주려고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박씨가 잡혀야만 김씨에 대한 처벌도 더욱 확실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처음에 담당검사님께서는 '이거는 사형이 안 나올 수 없다'고 했는데, 김씨는 정작 30년형 밖에 받지 않았다. 모든 책임을 박씨에게 돌린 결과"라고 지적했다.
A씨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청와대 청원이나 SNS 등에 글을 올리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쉽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문제 탓이다. 유사수신행위 업체를 운영하다 사정이 어려워져 동업자들과 필리핀으로 갔기 때문에 금전적 손해를 본 피해자가 상당하다.
사망한 피해자들은 박씨와 투자처를 논의했고, 결국 투자금을 노린 박씨가 살해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사건을 두고 "사기치고 도망갔다", "당할 사람들이 당했다" 등의 댓글들이 돌아왔다.
A씨는 "댓글을 보고 다시는 못 일어날까봐 차마 얘기를 잘 하진 못했다"며 "잘못은 잘못이지만 처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아직 주범은 처벌받지 않았다는 부분을 봐 주시길 호소드린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묵묵부답' 법무부…"국내 송환해서 죗값 치르게 해야"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A씨가 바라는 것은 빠른 체포와 국내 송환이다. 박씨에겐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졌지만, 그가 국내 경찰의 수사 상황을 전달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관련 기사 : CBS노컷뉴스-[단독]'사탕수수밭 살인' 주범, 경찰 '수사상황' 전달받았다) 박씨의 1년 가까운 도피 생활에는 이러한 배경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A씨는 "박씨가 돈이 많아서 그런지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며 "역추적으로 하면 박씨를 찾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본다. 수사정보 유출은 철저하게 수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A씨는 박씨의 국내 송환과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나서주길 호소하고 있다. 그는 "법무부에서는 늘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한번도 연락이 없었다"며 "전화를 해도 '잡혀야지 무엇을 하죠'라고 반복해 답변할 뿐, 무엇인가 진행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A씨는 박씨 송환을 촉구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박씨를 살인, 마약판매 혐의 등으로 지난 9일 고소한 상태다. 박씨가 필리핀에서 기소됐지만, 우리나라 검찰도 박씨를 궐석(피고인 불출석) 상태에서 기소해 송환에 대한 의지를 보여달라는 취지다.
그는 "탈옥을 두번하고 대놓고 마약을 판매하는데도 못 데려오는 것은 제 부족한 지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며 "이번에 못 잡으면 영영 못 잡을까봐 두렵다. 정부가 의지를 보여달라"고 거듭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