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피고인은 위선적" 재판부의 일갈,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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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집회 중 폭력 노조 간부에 "전태일 정신 아니다"
재중동포·노조에 "선량한 노동자 피해봐" 차별적 태도
재판부 역할 넘어선 권위적 훈계, 공감 못 얻어

※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주]

건설노조 집회 (자료사진=이한형 기자)

 

2020.8.25. 수원지법 안산지원 A씨 사건 선고 현장
재판부 "피고인 측은 법을 준수하라고 이 법정에서 외치고 있지만 1970년 11월 전태일이 죽어가면서까지 그토록 준수하라고 외쳤던, 그래서 숭고하게 지켜나가야 할 1988년 민주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사회의 법과 제도를 파괴하고 폭력과 협박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수원지법 안산지원의 한 형사법정에서 전태일 열사의 이름이 호명됐습니다. 집회 도중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 등으로 구속 재판을 받아온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건설노동조합(이하 민주노총 건설노조) 경기중서부건설지부 간부인 A씨의 선고 날이었습니다.

이날 방청석에 앉아있던 A씨의 동료 20여명은 노조 전임자에 대해 '전태일의 정신'을 강조한 판사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2주 전 A씨가 법정에서 최후변론을 하며 언급한 전태일 열사와 관련한 부분을 재판부가 재인용하며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양형사유에서 판사가 피고인에 대해 훈계와 계도성 발언을 하는 일은 종종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판사가 마치 피고인의 부모처럼 꾸짖거나 전지적 심판자 입장에서 발언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당시 방청석의 노조 조합원들 역시 판사의 지적에 숙연해지기보다는 다소 모욕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자세한 상황을 알려면 A씨 사건을 좀 들여다봐야 합니다.

A씨가 기소된 혐의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상해, 공무집행방해,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공동공갈)입니다. 안산 지역 건설현장들에 대해 지역 노동자를 고용하라고 촉구(공동공갈)하거나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집회를 열다 경찰과 마찰을 빚으며 생긴 범죄혐의입니다.

A씨는 매일 새벽 4시에 일감을 찾기 위해 오는 건설노동자 조합원들에게 그날 들어온 일을 연결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직업안정법 제18조에 따른 지역 건설노동자 무료 직업소개사업의 일환이었습니다.

하루 일감을 찾지 못한 조합원들과는 지역 건설노동자 고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진행했습니다. 이 역시 △경기도 지역건설산업 활성화 조례와 △안산시 지역건설근로자 우선고용 관련 조례에 의거해 법을 준수하라고 투쟁한 사안입니다.

건설현장에서 흔히 '십장', '오야지' 등으로 불리는 주체들이 이끄는 도급은 현행법상 명백히 불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건설사가 도급을 주고 수급인이 근로자를 채용하는 불법재하도급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행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A씨 등 노조 간부들은 적어도 공사 현장에서 한 팀 정도는 지역 노동자 직고용을 하라는 취지로 사업주들을 압박했습니다. 노조원인 직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임금 수준이 불법재하도급 근로자보다 높고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를 지켜야 하는 등의 조건을 맞춰야 해 사업주들로서는 '능률이 떨어진다'고 불편해했을 겁니다.

A씨와 동료들의 집회는 이처럼 최소한의 법을 지키라는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강압적인 언행이나 폭력적 행동이 수반됐습니다. A씨는 재판 과정에서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사죄했지만 재판부는 A씨에게 동종 전과가 많다는 점 등을 고려해 총 징역 2년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미지=법정 드라마 자료 갈무리)

 

2020.8.25. 수원지법 안산지원 A씨 사건 선고 현장


재판부 "피고인은 안산 ○○동 재건축 현장이 지역건설근로자 관련 조례를 위배해 집회를 진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사업주를) 협박해 취직시킨 근로자 중 대부분이 중국인인 점을 고려하면 '지역근로자 우선 취업'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변명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재판부 "(A씨의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재벌 등 경제적·사회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능률이 훨씬 떨어지는' 근로자를 고용하고도 정해진 하도급대금 범위 내에서 추가적인 인건비와 노조전임비까지 부담해야 하고 결국 적자도 감수해야 하는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하수급업체와 그 직원들입니다. 피고인 등의 방해가 없었더라면 원래 그곳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실력 좋고 성실한 건설근로자도 해당됩니다."

A씨의 반복된 폭력 행위엔 마땅한 처벌이 이뤄져야겠지만, 재판부가 A씨의 행위를 평가한 시각이 모두 타당한 지는 의문입니다. 안산은 대표적으로 외국인 시민 비중이 높은 지역이고 건설현장 등 일용직 노동자의 상당수가 재중동포입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A씨 등 노조의 연계로 취업한 노동자가 중국인이라는 점에서 A씨와 노조 측 주장이 '위선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연계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합법적으로 거주 중인 안산 시민입니다.)

재판부가 언급한 하수급업체 형태는 불법 고용행위를 통해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환경을 강요·방조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이 업체들이 노조 연계로 '합법적인 고용'을 할 경우 손실이 발생한다는 주장을 들어준 겁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각주를 달아 '증인(하수급업체 관계자) 증언에 의하면 …(중략)… 노조원을 썼을 때 전체적인 통계상 생산성이 60% 내지 50% 이하로 떨어진다'고 덧붙이며 '능률이 떨어진다'는 표현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2020.8.25. 수원지법 안산지원 A씨 사건 선고 현장
재판부 "피고인 측은 '피고인이 안산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활동가 사이에서 명망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수시로 협박과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명성과 인망이 높다고 하면, 우리가 숨 쉬고 일하고 살아가는 이 안산지역에 법을 지키고 덕(德)을 지닌 노동운동가가 그렇게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사실상 안산지역 근로자들과 노조원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 사회적 유대관계를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건설노조 조합원 등 4000여명의 탄원서 제출에 대해 반박하며)


판사의 호통과 일갈은 어떤 사건에서는 피해자를 비롯한 일반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2018년 중학생 딸의 친구를 성추행하고 살해한 이른바 '어금니 아빠' 사건에서 1심 재판부가 피고인이 현실과 동떨어진 반성문을 제출한 것을 두고 "위선적인 모습"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죠. 소년보호재판에선 '호통판사'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해 사건 재판부의 역할을 넘어선 권위적인 한 마디는 이제는 대체로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해 10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재판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이스라엘의 혁신 경영 사례를 참고하라"며 훈계해 빈축을 산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판결 내용이 범죄행위에 대한 평가가 아닌 피고인의 인격을 재단한 것이거나 특정 계층·직군에 대한 고정된 상을 토대로 쓰여졌다면 판결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겁니다.

'선량하고 성실한 근로자', '덕을 지닌 노동운동가'라는, 어찌 보면 '평범한' 표현에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왜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스스로 불법노동을 감당하는 노동자들이 많은 안산 지역의 법관이 특히 깊게 헤아려 주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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