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중심주의' 먼 사법부 '리셋' 요구하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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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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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방청연대②]가해자의 재판을 '감시'하는 이유
'n번방' 관련재판부터 '미투' 2차가해 재판까지 커버
활동가 D, SNS로 재판일정·문제점 공유…모니터링 교육도
70명 가량 '익명'으로 모여 가해자 엄벌 촉구하는 eNd팀
"피해자 돕고 가해자 압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
"디지털 성범죄 대한 판사들 몰이해 심각한 수준" 지적
리셋·추적단 불꽃 설문조사서 99% "형량 가중돼야" 응답
방청연대 "판사재량으로 양형 깎는 작량감경도 문제"
"피해자 지원, 거의 없어…시스템 약자 위해 기능해야"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사회에는 '페미니즘 리부트' 물결이 일었다. 당시 SNS에서 널리 퍼진 문구 중엔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성들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가 있었다. 올 초 'n번방'을 통해 드러난 텔레그램 기반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 분노한 여성들은 더 이상 사법부의 판단을 '방관'하지 않는다. 가해자들의 재판을 직접 '감시'하며 사법부의 '새로고침'을 요구하는 방청연대의 목소리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주]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 앞에서 '이색 풍경'이 펼쳐졌다. 열댓 명 정도 되는 여성들이 프린트물을 들고 빙 둘러앉은 가운데 한 여성이 홀로 일어나 당일 예정된 재판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는 여성들에게 '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실시한 사람은 바로 활동가 'D'(옛 '마녀')다. 이날 서부지법에서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전직 수행비서 김지은씨에 대해 '2차 가해'를 한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의 측근 어모씨의 공판준비기일이 열렸다.

앞서 지난 2018년 김씨가 JTBC '뉴스룸'에서 피해사실을 폭로한 이후 김씨 관련기사에 이혼사실을 적시하거나 욕설이 연상되는 초성이 담긴 악성 댓글을 단 어씨는 이날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도 '사회상규에 어긋나는 범죄는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김씨의 이혼은 '가치중립적 표현'이며, 당시 피해여부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적 인물, 공적 관심사'에 대해 발언할 자유가 있다는 취지였다.

"웃기잖아요. 누가 봐도 욕인데...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 대법원 판례 중에 부분적으로 내 입장, 상황을 과장하면서 나오는 부분에 대해 모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있긴 한데 그렇다고 'ㅁㅊㄴ'은 아니죠. 공공연하게 피해사실을 폭로한다고 공적인 인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활동가 D)

"(안 전 지사) 2심이 유죄로 바뀌기 전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흔든 게 (사건) 초기부터 형성됐던 댓글이에요. 그 때문에 1심도 사실 무죄의 영향을 받았고 측근들의 역할이 너무 컸다고 생각하거든요."(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부소장)

이미 'n번방'을 비롯한 여러 성범죄 재판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방청연대' 여성들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공판에 대한 피드백을 나눴다. '박사' 조주빈 등을 필두로 텔레그램에서 성착취물을 제작, 배포한 n번방 사건에 공분한 여성들은 관련재판을 자발적으로 방청하는 동시에 연대의 저변을 확대해가고 있다.

◇ "피해자 응원하면서 가해자 압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지난 24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측근, 어모씨의 공판준비기일 당시 활동가 'D'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트윗들.(사진=트위터 캡처)

 

방청연대라는 말은 그 자신이 성범죄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D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10년 전 성폭력 피해를 당한 D는 가해자의 보복성 고소와 민사소송을 마무리짓는 데만 4년의 시간이 걸렸다. 트위터(@D_T_Monitoring)를 통해 n번방을 포함한 각종 성폭력 재판일정을 공유하며 참관한 공판의 문제점과 핵심쟁점을 짚어주는 D는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어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텔레그램 n번방 공판이 열리는 서울·인천·수원·춘천·안동에서 트위터로 모집한 방청연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진행 중이다.

D는 "성폭력 피해로 인한 언어체계의 붕괴, 가해자의 출소 등으로 인해 익명으로 표현할 곳을 찾다가 트위터를 알게 됐다"며 "익명으로 경험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위터 공개 게시글로는 수사·재판에 대한 일반적 정보를 게시했고, 디엠(DM·Direct Message) 등을 통해서는 개별적 상황에 맞는 정보 및 전략을 제공하다가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의 조력을 받기 어려운 피해자들을 위해 수사기관 등에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했다"며 "누구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와 전략을 전달하지 않아 그 역할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피해 당시 '현재의 나' 같은 연대자가 곁에 있었다면 하는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거리유지'와 '주제파악'을 일종의 강령으로 삼고 있다고도 했다. D는 "제가 선택한 연대는 사법시스템을 활용한 방식인데, 이 두 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할 수 있는 영역과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피해자를 통제하려는 욕구로 연대가 틀어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n번방 등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사법부에 대한 감시·기록·목격을 위한 일반인 연대자 양성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전국 단위로 진행되는 재판을 혼자 커버하는 일이 역부족임을 느꼈고, "계속 해당범죄들을 추적하던 입장에서 재판이 얼마나 엉망으로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n번방 가해자들의 엄벌과 사건의 확실한 공론화를 추진하기 위해 결성된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eNd)'(@nbun_out)팀 또한 n번방 관련재판을 집요하게 쫓고 있는 방청연대의 일원이다. 지난 6일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불허되자 즉각 규탄집회에 나서기도 했던 eNd팀은 익명으로 모인 70명 가량이 학업과 생업을 병행하며 바쁜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eNd팀은 "재판에서 피고인 측의 뻔뻔한 태도나 법정 내 2차 가해,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터무니없는 판결과 그 사유들을 마주하면 정서적인 피로감을 느낄 때도 있다"며 "그럼에도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면서 가해자를 압박하고, 법원을 감시하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방법 중 하나가 방청연대임을 알기에 해당활동에 더욱 신경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 "'디지털 성범죄' 양형정비는 기본, 法 인식전환도 필수"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eNd팀이 지난 7일 낮 서울고법 앞에서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법원의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사진=이은지 기자)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텔레그램을 무대로 성행한 성착취 범죄의 실상이 드러난 후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에서 큰 호응을 얻은 해시태그다. n번방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가 출연한 배경에는 성범죄에 줄곧 미온적으로 대처한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과 양형기준이 한몫했다는 비판이다.

앞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지난 3월 4일부터 13일까지 판사 668명을 대상으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범죄에 대한 기본양형(가중·감경 배제)'을 설문한 결과, 31.6%(211명)가 징역 3년이 가장 적절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대법 젠더법연구회 소속 판사 13명이 설문에서 제시된 양형 자체가 '지나치게 낮다'며 설문조사 재검토를 요구한 점을 감안해도 적잖은 법관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여성가족부가 올 초 아동·청소년 성보호 관련단체 165곳과 학계·법조계 전문가 2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는 동종범죄에 대해 3배가 넘는 '10.25년형'이 적정하다는 답이 나왔다.

이에 대해 D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판사들의 몰이해와 무지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현직 판사들을 만났을 때, 해당 사건들의 판결문을 분석할 때도 느낀 점이지만 한국 판사들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너무 모른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를 여전히 신체적 접촉이 전제가 되는 물리적 성폭력보다 약한 범죄로 인식하며, 디지털 환경이나 매체에 대해 무지한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며 "무지해도 될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법원이야말로 한국 성범죄의 악순환적 고리 중 하나"라고 날을 세웠다.

디지털 환경을 악용한 n번방류 범죄의 특수성을 반영해 기본양형이 상향되더라도 개별 판사들이 갖는 재량권 역시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n번방을 처음 조명한 추적단 불꽃(대학생 취재단)과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ReSET)'이 지난 6~7월 일반시민 63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설문조사를 보면, 극소수를 제외한 인원(99.2%·6310명)이 '특별한 사유에 따라 형량이 가중돼야 한다'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변했다. 반면 '특별한 사유에 따라 형량이 감경돼야 한다'는 항목에서는 "아니다"라는 응답(97.5%·6202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응답자의 '99% 이상'은 n번방 유사사건에서 감경사유로 적용된 △집행유예 이상 전과 없음 △호기심/충동적으로 범행 △벌금형 이상 전과 없음 △영리 목적 아님 등에 대해 "적합하지 않다"고 바라봤다. 그 외 △부양가족 있음 △피고인 가족 선처탄원 △초범 △범행 1회에 그친 점 △피해자 신원 노출 안됨/신체 일부만 노출 등도 죗값을 깎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판정했다.

D는 "형법 제53조인 '작량감경'은 그간 합당한 이유 없이 성범죄, 특히 디지털 성범죄 선처를 위한 도구로 활용돼왔다"며 "아무리 양형기준을 만들어 놓는다 해도 판사 개개인의 재량에 따라, 기준 형의 반 정도를 깎을 수 있는 작량감경의 문제를 짚지 않으면 여러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eNd팀 또한 "법과 제도가 강화된다 해도 이를 통해 구형을 하고 판결을 내리는 판·검사가 범죄에 대해 엄중히 죄를 물을 의지가 없다면 현재와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법조계 인사들의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절실하고, 극단적인 경우 해당 판·검사가 국민적으로 지탄받고 그 자질을 다시 검증받는 제도 또한 준비돼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 "피해자 지원은 거의 全無…사법시스템 약자 위해 기능해야"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eNd팀이 지난 4월 기획, 개최한 집회 포스터.(사진=eNd팀 제공)

 

방청연대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사필귀정'은 #가해자는_감옥으로, #피해자는_일상으로, 다. 범죄 성격상 자극적으로 소비되고 잠시 여론이 들끓기는 쉽지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생존과 회복은 훨씬 장기적인 과제라는 점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피해자가 어렵게 수사기관에 피해를 호소하더라도, 지난한 사법절차를 거치면서 학업, 생업의 터전을 잃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일이 빈번한 탓이다.

D는 "성폭력 피해를 입게 되면 일상이 뒤틀린다. 상당수 피해자들이 피해 회복을 위해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그럴 공간과 시간, 비용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며 "저 역시 (고소 후) 생업을 포기했고, 경력은 끊겼으며 신용불량이 되어 바닥에서 다시 올라와야 했다"고 털어놨다.

출소 이후 교육과 사회복귀를 위한 직업훈련 등의 지원을 받는 가해자들보다 오히려 피해자가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D는 "민사 등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맘 편한 소리들도 하는데, 일단 민사소송은 피해자 정보가 여과없이 가해자에게 넘어가게 돼 그로 인한 추가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며 "승소한다 해도 실질적으로 집행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아 피해자의 감당비용만 증가하기도 한다. 저 역시 민사소송도 이겼지만 가해자가 미리 재산을 빼돌리고 집행을 방해했다"고 말했다.

eNd팀도 "범죄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의 존재와 일상"이라고 강조했다.

eNd팀은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나면 가장 많이 이어지는 것이 바로 2차 가해다. 피해자에게 완전무결함을 강요하는 대중, 이를 조장하며 화제성을 위해 피해사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언론, 가해자에 중심을 맞춰 진행되는 법원의 재판도 이에 포함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부당하게 범죄의 피해자가 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공적 차원에서 피해자에게 물리적 보상과 함께 지속적인 정신적 보상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며 "언론과 대중도 피해자의 일상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도록 스스로 자정하며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바뀔 줄 알았던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 분노하며 절망"(eNd팀)하고 "사법시스템이 피해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현재가 최악의 연속"(D)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이 더딘 변화의 수순임을 믿고 있다.

D는 "시스템이 피해자, 약자, 소수자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고 믿는다"며 "큰 흐름으로 보면 변화는 지속돼 왔고, 이 순간들도 그 변화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 장점을 살려 피해자와 연대하는 더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고 실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Nd팀 역시 "가능한 한 모든 n번방 가해자들이 죗값에 맞는 무거운 처벌을 받을 때까지 활동을 진행할 것"이라며 "누군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활동을 그만둔다면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리란 믿음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n번방을 끝까지 감시하고 제대로 완결짓는 것이 다음에 나타날 또다른 'n번방'을 끊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라고 거들었다.

한편 대법원 양형위는 n번방 사건 이후 국회에서 통과된 관련 법안들에 맞춰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상향하기로 기본 방침을 정하고, 오는 9월 양형기준안을 공개한 뒤 관계기관 의견조회와 공청회 등을 거쳐 12월 전체회의를 열어 최종 의결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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