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성범죄 피해자 위축될라…소법정으로" 반가운 법원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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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피해자 변호사 요구대로 대법정 아닌 소법정에서 증인신문"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2020.6.25 '박사방 사건' 조주빈 등 공판 中

재판장: 그리고…오늘 피해자 증인신문을 위해 저희가 법정을 좀 바꾸겠습니다. 피해자 변호사께서 요구하신 것처럼 이 법정 같은 큰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하면 피해자들이 위축될 수 있어서…(중략)…여기까지는 대법정에서 하고 증인신문은 오후 4시 소법정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방청객들은 궁금한 내용이 있더라도 4시 사건은 비공개로 진행할 겁니다. 나오셔도 방청은 불가능합니다.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의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25일 오전 검찰 송치를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2020.3.25 (사진=이한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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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는 여성을 성 착취 대상으로 삼고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던 '박사' 조주빈과 그의 공범들인 '태평양' 이모(16)군, 전직 사회복무요원 강모(24)씨의 두 번째 공판이 진행됐습니다.

여론의 관심이 주목된 만큼 취재진은 물론, 일반 방청객부터 n번방 사건 엄벌을 촉구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몰려 이 사건 재판은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법정에서 진행 중입니다.

이날은 지난 기일에 출석하지 못한 성착취 범행 피해자에 대한 첫 증인신문이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당연히 피해자가 나오는 만큼 증인신문은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여기서 재판부는 한 가지 사항을 더 추가로 공지했습니다.

바로 "피해자 변호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증인신문 장소를 재판이 진행 중이던 대법정이 아닌 소법정으로 옮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방청객이 없더라도 이 큰 법정에 피해자가 홀로 서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판단입니다.

사실 이 재판에서 재판부가 피해자를 최대한 우선하려는 듯한 모습이 보인 것은 이날만은 아닙니다.

조주빈이 재판에 넘겨진 후 처음 열린 재판에서도 재판부는 상당히 이례적인 결정을 했습니다.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을 낭독하는 검찰의 모두진술을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2020.4.29 '박사방 사건' 조주빈 등 첫 공판준비기일 中

재판장 "검찰에서 모두진술 하기 전에 재판부로서는 다소 고민이 있습니다. 기자분들도 많이 오셨는데 피해자 변호사들로부터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해달라는 의견서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전체를 모두 비공개로 하는 것은 알 권리 측면에서 어려워 보이지만 피해자가 나오는 증거조사는 물론 비공개로 해야겠고 또 어디까지를 비공개로 할지는 재판부로서 조금 고민이 되는 상황인데…(중략)…우선 검찰의 모두 진술은 피해자 가명 등이 상당히 많이 나오기 때문에 비공개로 하기로 결정하겠습니다"


보통 첫 재판에서 이뤄지는 피고인들의 죄명, 공소사실이 낭독되는 검찰의 모두진술은 공개재판이 원칙인 만큼 성범죄 관련 재판이라도 비공개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날 변호인 측이 요구한 재판 전체에 대한 비공개 진행은 어렵지만 공소사실 낭독에서 피해사실이 외부로 공개되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 변호인들에게 "저희(재판부)가 예상치 못하게 피해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신상이 노출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으니 발생하지 않도록, 만약 발생해도 찰나에 그치도록 바로 바로 이의제기를 부탁드린다"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사소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 대목이었습니다.

사실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어느 사건보다 중요한 성범죄 사건에서 재판부의 이같은 자세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범죄에서 '피해자 중심주의' 시각이 결여돼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법원이 "당연한 배려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지=연합뉴스)
2년 전 국내에서도 시작된 '미투' 운동 당시 한국 사회가 그간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에게 엄격하고 가해자에게 너그러웠다는 비판에서 법원도 결코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국내 미투 운동의 불을 붙인 '안희정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인 비서 김지은씨에게 '피해자다움'과 '정조'라는 시대와 동떨어진 표현들을 쓰며 여성계를 비롯한 각계로부터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올해 초 여성을 성착취 대상으로 삼은 조주빈을 위시로 한 'n번방 사건'이 터졌을 때는 사법부의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조주빈과 유사한 범행을 저지른 성범죄자들이 '반성'이나 '초범'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 등 범행에 비해 가벼운 처벌에 그쳤던 것으로 드러나며 "법원의 판결이 n번방 사건을 키웠다"는 비난도 들끓었습니다.

이같은 비판과 함께 시작한 조주빈 사건인만큼 사소한 부분이라도 피해자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듯한 모습들은 분명 "법원이 변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보입니다.

물론 부족한 점도 여전히 많습니다. 일례로 최근 진행된 가수 정준영씨와 최종훈씨의 항소심 선고기일에서 재판부는 성폭력 가해자인 정씨와 피해여성을 '선남선녀'로 칭해 여전히 성범죄에 대한 안일한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피해자와 합의 없이 '반성하는 태도'만으로 정씨는 1심보다 감형받기도 했습니다. 취재진과 방청객이 가득찬 재판에서도 이러한데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재판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과연 잘 작동할 지에 대한 불신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이 조주빈 등 n번방 성착취범들의 재판만큼은 '달라진 법원'을 기대하는 눈길이 많습니다. 또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지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며 꼬박꼬박 공판이 열릴 때마다 법정을 찾는 발길도 늘었습니다. 재판의 진행과정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판결이라는 결과에서도 이제 가해자가 아닌 고통받고 무너진 피해자의 상황이 먼저 고려돼야 하고 그래야만 국민 법 감정과 동떨어지지 않은 처벌이 이뤄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이제 공은 법원으로 넘어왔습니다. 경찰은 텔레그램 등 sns를 통해 익명성의 가면 뒤에 숨은 이들을 추적해 하나하나 검거했습니다. 이를 넘겨받은 검찰은 이들을 성착취라는 수단으로 공통된 목적을 가진 범죄집단이었음을 입증해내며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해 기소했습니다. 이제 법원이 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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