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점령 직전 제3사단 후방 지휘소로 사용되었고, 미군 폭격으로 손상된 포항여중(현, 포항여고) 건물 (촬영:1050년9월3일. 트루먼 박물관 소장). (사진=포항6.25 제공)
<6.25 70주년 특집 – 포항6.25> 4편
■ 방송 : 포항CBS <김유정의 톡톡동해안> FM 91.5 (17:05~17:30)
■ 진행 : 김유정 아나운서
■ 제작 : 김선영 PD
■ 대담 : 이상준 향토사학자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포항지역 6.25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학도병들의 희생과 포항 탈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나와계십니다. 안녕하세요?'
◆ 이상준> 네, 안녕하십니까!
◇ 김유정> 지난 시간에 포항에서 일어난 전투 중 죽장 구암산 전투, 그리고 미군의 포항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오늘은 많은 시민들이 알고 있는 학도병 참전에 대해 소개 해주신다구요?
◆ 이상준> 네,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포항의 학도 의용군 참전에 대해서 즉, 포항여중 전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그날 좀 더 앞에 있었던 소티재 전투에 대해 오늘 소개를 좀 하고자 하는데요. 포항은 1950년 8월 11일에 인민군부대에게 함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포항여중 전투가 있기 3시간 전에 소티재에서 먼저 포항출신 학도병들이 용전분투하고 산화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여기서 희생된 학도병들은 주로 현재의 포항고등학교, 동지고등학교, 포항수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가 자원입대한 포항출신 학도병들이었습니다. 포항 시내에서 북서쪽 2㎞지점에 있는 소티재는 흥해에서 포항으로 가거나 들어오는 길목으로 포항 방어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중요지형이었지요. 국군 제25연대의 구성 요원 대다수가 그러하였듯이, 제9중대도 마찬가지로 고참병사는 극소수이고 장교도 중대장을 포함한 3명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학도병이었습니다. 이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가 8월 10일 자정이 지난 무렵에 북한군이 소티재에 나타났습니다. 이때부터 3시간에 걸쳐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끝내는 백병전까지 전개되었고요. 결국에 소티재에서 방어하던 병력들은 거의가 다 전멸했지요.
◇ 김유정> 소티재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도 많았겠군요
◆ 이상준> 그렇습니다. 9중대장이 잔여 병력을 파악한 결과 제1소대장(유동준 소위)을 비롯한 각 소대장 전원과 대다수 중대원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살아있는 사람은 중대장을 포함한 15명뿐이었다고 합니다. 중대 소속 학도병들은 전원 전사하였는데, 180명 중에 160명이 전사한 것입니다. 너무 처참한 정경에 충격을 받은 생존자들은 넋을 잃은 듯이 두리번거리고 있을 무렵, 포항 시내 방향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포항여중에서 첫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 김유정> 소티재 전투에 이어서 그 유명한 포항여중 전투가 있었던 건가요?
◆ 이상준> 그렇습니다. 이무렵 포항여중에는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있었고, 서울에서 온 학도병 71명이 이 진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03:00시경 포항여중 인근에서 총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소티재 고지에서 제25연대 제9중대가 0시부터 3시까지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기 때문이었지요. 포항 출신 학도병들이 먼저 산화한 소티재고지 전투가 후방지휘소의 경계를 맡은 학도병들의 전투 준비 시간과 최소한 마음가짐을 다지는 귀중한 시간을 벌게 해준 셈이었습니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들은 학교 울타리 밑에서 11시간 동안 네 차례나 북한군의 파상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결국은 탄약이 바닥나고 백병전 끝에 결국 학도병들이 패하여 포항여중이 무너지자 18:00경 북한군의 장갑차량부대가 포항시에 진입하였고, 포항 시내 주민들은 영일만에 정박해 있던 700여 척의 어선 등을 통해 피난을 했습니다.. 이날 부로 인민군에 의해 포항은 완전 점령되었습니다.
◇ 김유정> 아직 어린 학생인데다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71명의 학도병들은 결국 어떻게 됐나요?
◆ 이상준> 이 전투에서 학도병 71명 중 48명이 전사하였고, 나머지 학도병들은 포항여중 방어선을 고수하면서 모두 쓰러질 때까지 버티고 싸웠습니다. 총성이 멎고 전투에서 부상으로 실신했던 13명은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기계면의 북한군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지금까지도 살아있다고 합니다.
◇ 김유정> 당시 학도병들의 시신을 모아서 매장한 다음 표지를 세웠다구요?
◆ 이상준>전투 1주일 후 포항을 탈환하게 되는데 이때 제3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학도병들의 시신을 보고 수습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학도병 시신 48구를 발견하고 시신을 모아 가매장한 후 표지판을 세웠습니다.
1950년 9월 3일 포항제일교회(현,소망교회)건물. 박물관의 사진 설명에는 포항동에 대한 미군폭격 1일 후 가톨릭교회만이 피해없이 서 있다고 되어 있다.(트루먼 박물관 소장). (사진=포항6.25 제공)
◇ 김유정> 다음으로 송라 독석리에서는 피난민이 포함된 해상 철수작전이 진행됐다구요?
◆ 이상준> 그렇습니다. 포항을 지키려는 사단은 국군 제3사단이었는데, 이 부대가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면서 강구 오십천교 부근에서 인민군 5사단과 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계쪽에서 인민군 12사단에서 포항을 점령해버렸어요. 그래서 국군 제3사단은 강구 오십천교 부근에서 고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제3사단은 미군과 같이 의논을 해서 송라면 독석리 라는 곳에서 배를 타고 구룡포로 후퇴를 하게 되지요. 이것이 그 유명한 독석리 철수작전입니다.
◇ 김유정> 전쟁이 발발한지 두 달도 안돼서 포항마저 함락당했는데, 그러면 언제 또 포항이 다시 탈환됐나요?
◆ 이상준> 북한군이 8월 11일에 포항으로 들어왔으므로 우리 아군들은 포항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북한군은 포항 시가지에서 일단 철수하였다가 연일쪽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가 13일 1개 연대가 다시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8월 15일 육군본부는 이날 군 예비대로 확보 중이던 영천의 민기식 부대를 포항으로 보내어 포항 탈환을 명령하였습니다. 8월 18일 이창범 민부대 제2대대장을 선두로 포항 탈환을 위해 진격했는데요. 이때 포항시가지는 폭격과 포격으로 폐허가 되고, 건물들도 앙상하게 자취만 남긴 상태였고, 포항시가지를 거의 무혈 탈환한 민부대가 즉시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는 북한군의 추격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삿갓봉고지가 나오는데요, 일명 천마산 전투라고 합니다. 양덕에 가면 93m 정도 되는 나지막한 고지가 있습니다. 이 고지를 목표로 전진을 계속하던 중 날이 저물어 이인리와 동쪽 두호동을 연결하는 지점을 점령한 후에 부근 능선 일대에 각 대대를 배치하고 탈환에 성공한 민부대가 원래 포항을 지키던 3사단에게 이 삿갓봉 고지와 전선을 넘겨주게 됩니다.
◇ 김유정> 6.25전쟁당시 포항이 정말 중요한 요충지라고 하셨는데, 정말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많았네요.. 앞서 학도병들이 산화한 얘기 해주셨는데, 어린 학생들이 총도 없이 북한군과 싸운 건 정말 그 용기와 정신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 이상준> 그렇습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하잖아요. 포항 주변의 이름없는 능선 골짜기에서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우리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그들이 지킨 거룩하고 고귀한 이 나라를 잊어서는 안되고 그분들의 희생정신도 또한 절대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 김유정> 네 목요일에 다시 뵐게요. 고맙습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