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명필름 제공)
남들처럼 살다 보면 성공하는 줄 알았다. 자의 반 타의 반 떠밀려 살았다. 그러다 내가 원한 건지, 누가 원한 건지도 모를 꿈을 접고 서울에서 벌교로 내려왔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벌교, 그곳에 낡은 극장 '국도극장'이 있다. 그렇게 생계를 위해 기태(이동휘)는 한때 개봉관이었지만, 지금은 재개봉관이 된 국도극장에서 일하게 된다.
영화는 싫지만 '영웅본색'은 솔찬히 재밌게 봤다는 간판장이 겸 극장 관리인 오씨(이한위), 우연히 만난 동창생이자 가수 지망생 영은(이상희)과 시간을 보내며 기태는 조금씩 마음이 편해진다. 누군가 옆에 있어도 헛헛하기만 했던 기태의 마음이 홀로 담배를 피워도 미소 지을 줄 알게 됐다. 오롯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 자의 미소다.
혼자 남겨진 기태가 미소 짓기까지 전지희 감독은 재촉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압박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그런 기태를 바라보는 관객도 위로받고 따스함을 느꼈다.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 "괜찮아요, 나의 지금이 그리 영화 같진 않더라도"라는 말이 영화 내내 들려왔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전지희 감독을 만났다. 영화가 그대로 내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와 영화 '국도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사진=명필름 제공)
◇ 전지희 감독의 처음: 극장, 간판, 그리고 기태전 감독은 '국도극장'을 돌이켜보니 '힘듦'이 먼저 떠오른다며 웃었다. 물론 제작과정에서의 힘듦이다. '국도극장'은 감독의 데뷔작이다. 신인 감독으로서 만난 영화 현장은 매 순간이 처음 겪는 순간이었고, 당연히 쉽지 않았다.
"처음이라 제가 너무 경험도 없었고, 노련하지 못하니까 현장에서 다른 분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영화가 공개된 후에도 뭔가 '해냈어' '기뻐' 이런 것보다도 아직은 솔직히 좀 힘들고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감정이 많은 거 같아요. 이제 돌이키기는 어려운 거 같고, 조금씩 배우면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웃음)'국도극장'의 시작은 전지희 감독이 어릴 적 썼던 단편영화다. 거기서 극장과 간판, 주인공의 심리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조금씩 바꿨다. 한때는 개봉관이었지만 지금은 낡은 재개봉관이 된 영화관, 그리고 그곳에서 새롭게 일하게 된 만년 고시생 기태. 기태는 사법고시가 폐지되며 반강제적으로 고시생의 삶이 종료된 인물이다.
(사진=명필름 제공)
시나리오를 쓸 당시 사법고시를 폐지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고시생들이 폐지 반대 시위에 나섰다. 그는 "고시 하나만 바라보고 몇 년씩 사셨던 분들은 굉장히 절망적이겠구나 싶었다"며 "그러면서 주인공이 사시생이 됐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이야기가 됐다"고 말했다.
"잘 들여다보면 정말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휩쓸려가듯 다들 그렇게 가니까 맞춰갈 때가 있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생각도 못 해본 상황에서 세속적인 꿈이 좌절됐을 때는 대안이 없잖아요. 이 길로만 달려왔는데 이제 어떡하지? 그런 와중에 기태가 고향으로 내려왔고, 그것만이 길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많고 많은 곳 중 기태의 고향을 벌교로 한 것은 심리적 그리고 물리적으로 멀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 감독은 "기태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진짜 가기 싫은 느낌이어야 하고, 한 번 가면 다시 서울로 오기 쉽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땅끝 벌교가 됐다"며 "외관은 문화재로 등록된 벌교금융조합 건물이고, 내부는 광주극장에서 찍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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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태를 바라보는 전지희 감독의 눈6년 넘게 서울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기태는 사법고시 폐지와 함께 고향 벌교로 내려온다. 형 희태(김서하)와 차별하는 엄마(신신애), 성과 없이 낙향한 자신을 무시하는 형과 친구들로 인해 부담감을 느낀다. 그런 와중에 만난 영은(이상희)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력 강한 면모를 보인다. 그의 꿈은 기태와 반대로 벌교를 떠나 서울에서 가수가 되는 것이다.
전 감독은 기태에 관해 "한 마디로 못난 놈"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불만은 많은데 밖에 나가서는 한 마디도 못 하면서 집에 와서는 깽판 치는 못난 놈이다. 소심하고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은 또 낮다"며 "그러면서도 미워할 수가 없는 게 모두 다 그런 모습을 갖고 있잖나.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내 모습 같은 느낌의 인물이 기태"라고 말했다.
영은은 전 감독에게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밝게, 걸릴 것 없이 사는 것 같으면서도 그 이면에 슬픔이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이 영은의 인생을 크게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며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다들 인간의 어떤 한 면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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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기태 가족이 엄마의 생신을 맞아 중국집에서 식사하는 장면, 기태와 형 사이 의견 대립으로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영은이 주전자 퍼포먼스를 한다. 어쩐지 희비극이 뒤섞인 이 장면에 관해 전 감독은 "대비되는 걸 보여주려 했다. 남들이 볼 때 너네 싸우는 게 이런 느낌이야 정도가 됐으면 했다"고 말했다.
해당 장면뿐 아니라 영화에는 전 감독만의 유머가 들어가 있다. 그 덕에 기태의 절망과 스트레스를 너무 무거운 공기 속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감독은 "내가 그런 사람인 거 같다. 세상이나 인생을 보는 눈이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성공의 상징으로 불리는 도시 서울. 그곳에서 실패를 겪고 내려온 기태가 이제 좀 적응해서 살 만하니 다들 기태 곁을 떠난다. 마음속 멍울진 감정, 오해가 풀린 관계, 친밀해진 관계들이 하나둘 떠난다. 그런데도 혼자 있는 기태의 표정은 모두가 옆에 있을 때보다 어둡지 않다.
"왜 오씨까지 그렇게 가야 하느냐고 말씀한 분도 계세요. 사실 그건 의도가 있었어요. 내 주변에 사랑하는 만 명의 사람이 있어도 내 문제를 해결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거든요.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본질은 '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는 외부에서 나의 즐거움과 행복, 편안함을 찾으려 하면 변수가 너무 많다고 했다. 마치 기태가 처했던 상황처럼 말이다. 기태가 원했던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해도 기태의 마음이 온전히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면 결국 거기서도 오롯이 행복을 찾을 수 없었을 거다.
(사진=명필름 제공)
◇ 들꽃처럼 흘러가다 우연히 내려앉듯이…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기태가 홀로 꽃 한 송이 피어난 국도극장 앞에 있으면서도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거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채 빠르게 흐르는 삶에 지쳤던 기태가 벌교에 와서 조금씩 천천히 담배 연기와 함께 호흡을 뱉어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쌓여 어느덧 자신을 마주하게 됐다. 이 순간을 이동휘는 몇 분간 대사 없이 눈빛으로, 온몸으로 표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동휘의 연기는 특히나 인상적이다. 감독은 "동휘씨가 최근 코믹한 이미지의 연기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되게 진지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아주 다르다"며 "배우로서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어 했다. 많은 분이 알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래부터 마지막 장면은 롱테이크로 구상했다. 전 감독은 "그곳은 최근 기태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자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그 공간에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며 "이미 뭔가 알아버린 이후에는 전혀 외롭지 않을 거 같았다"고 말했다.
(사진=명필름 제공)
"이름도 모르는 들꽃처럼 흘러가다가 어디에 우연히 내려앉으면 꽃이 피고 또 씨가 날아가고…. 자연스럽게 사는 게 좋지 않냐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관된 주제는 그거예요. 내 안에서의 평화가 가장 우선이지 않을까 하는 것 말이죠."전 감독은 '국도극장'과 함께한 두 시간이 관객들에게 '나'를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봐 줄 수 있는 시간이길 바랐다. 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기태를 따스하게 바라봤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바깥을 보며 쟤는 잘되는데 나는 왜 이러나 비교를 하죠. 그러지 말고 나는 지금 어떻게 숨을 쉬고 있나, 너무 깊지 않게라도 나를 한 번 바라보면 좋겠어요. 요즘 시국에 극장에 와달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려 많이 애쓰고 있어요. 세상에 이런 영화도 있다는 걸 따뜻하고 넓은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웃음)◇ 전지희 감독이 영화 속 덕근이로 출연한 개에게 보내는 짤막한 편지"덕근이에게.
벌교 파출소에 있는 가명 덕근이, 잘 있니?
우리가 급하게 섭외했음에도 아주 순조롭게 촬영이 잘 끝났어.
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