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북한으로 날아가지 못한 대북전단이 파주의 한 논바닥에 떨어져있다.(사진=권영철 대기자)
정부의 잇따른 대화 제의에도 묵묵부답해온 북한이 5년여 만에 갑자기 대북전단을 문제 삼고 나서 배경이 주목된다.
◇새로울 것 없는 대북전단 살포, 김여정이 다시 문제삼고 나온 이유는?북한은 4일 노동신문에 게재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담화를 통해 일부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망나니 짓' '쓰레기들의 광대놀음' 등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러면서 우리 당국에 대해서도 이들 행위를 계속 용인, 방치한다면 개성공단 완전 철거나 9.19 군사합의 파기 등의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국내 일부 인사들에 의한 대북전단 살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북한이 이번에 지목한 것은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달 31일 김포에서 날려 보낸 대북전단이지만 이 단체는 4월 30일에도 강화도에서 대북전단 풍선을 띄우는 등 한두 달 간격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잠하던 북한이 새삼스레 발끈하고 나선 것은 진의가 따로 있을 것으로 보인다.
탈북민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달 31일 김포시 월곶리 성동리에서 전단을 살포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북한, 5년 전에도 갑자기 대북전단 살포 비난…정부는 대화 제스처로 해석
북한의 이날 반응은 5년여 전인 2015년 초 상황과도 기시감을 주듯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당시 김정은 제1비서는 신년사에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데 따라 최고위급 회담(정상회담)도 못할 이유가 없다"며 남북관계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시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북한이 신년사 발표 닷새 뒤 돌연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은 사실이다. 당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북전단 살포는 흔한 일이었고, 심지어 몇 달 전인 2014년 10월에는 북측이 대북 풍선에 고사총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북한이 나름대로 대화 제스처를 보낸 것으로 보고 대응에 나섰다. 대화를 위한 '분위기와 환경' 마련에 나선 것이다.
당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국회 답변에서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해 "주민 안전을 위해 취할 조치가 있다면 취하겠다"고 밝혔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도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 '필요 조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초당적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보수진영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핑계 삼아 그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물론 남북관계는 연초의 기대감은 오간데 없이 다시 악화일로에 빠져들었다.
그해 3월에는 통일준비위원회 고위 인사의 '흡수통일' 발언이 북한을 자극했고 북한은 '통일대전'(무력통일)으로 응수했다.
8월에는 DMZ 지뢰사건이 벌어지고 우리 군 당국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로 맞대응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연초의 대화 모멘텀을 살리지 못한 남북은 결국 이듬해인 2016년 4차 핵실험(수소탄)과 개성공단 폐쇄, 잇따른 고강도 유엔 대북제재 등을 주고받으며 나락을 헤맸다.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의원(사진=연합뉴스)
◇김홍걸 "성의 보여주면 대화 나서겠다는 메시지"…전문가 "군부 아닌 김여정이 나선 것도 주목"
이런 전례를 되짚어볼 때 북한의 뜬금없는 대북전단 트집을 반드시 나쁜 신호로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우리 측의 잇단 대화 공세에도 침묵하던 북한이 어찌됐든 말문을 열었고, 그것도 '백두혈통' 김여정 제1부부장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제의해온 코로나19 방역 등의 의제에 직접적으로 응할 경우 남측의 대화 주도권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남측의 태도를 시험해보겠다는 의중도 엿보인다.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의원은 페이스북 글에서 "자존심과 체면을 지켜야 하기에 노골적으로 남측에 교류 재개를 제안할 수도 없다"며 "우리 측에게 성의를 보여주면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북한의 이날 담화가 거친 표현 수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내용과 형식은 나름대로 조절한 흔적이 보인다.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이 곧 도래함을 잊지 않고 언급한 것도 눈에 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원래 인민무력성 같은 군부에서 메시지가 나가야 하지만 김여정 제1부부장이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했고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우리 정부의 돌파 의지와 역량을 계속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